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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성 수필]

장날이면 약방 손님이 많았다. 손님 중에는 평소에 보기 어려운 사람들도 많았다. 약값 대신 송이버섯을 내미는 산골 할머니도 있었고, 훈장을 단 군복 소매 끝에 번쩍이는 갈고리가 삐죽 나와 있는 상이군인들이 연필을 팔러 오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좁은 약방 안에 앉아 버틸 수가 없어 약방 유리문 앞에 나와 앉아 있곤 했다.

[ 8 ] 삼촌네 약방 유리창 밖 풍경

2019. 10. 16 by 김홍성 시인
삼촌네 약방 유리창은 내 그림 공책이기도 했다.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손가락으로 그렸다. 겨울에는 유리창에 낀 성애를 긁으면서 놀았다. ⓒ김홍성 

 


삼촌네 약방 밖은 버스 정류장이었다. 정류장 앞에 길게 이어진 국도는 자갈투성이였고 바람만 조금 불어도 흙먼지가 일었다. 삼촌은 군용 철모에 긴 자루를 단 연장으로 도랑물을 퍼서 흙먼지를 재우려고 애썼다. 종일 도랑물을 뿌려대도 콩고물 같은 흙먼지를 아주 잠재울 수는 없었다. 물기가 마르면 지프차 한 대만 지나가도 뭉게구름 같은 흙먼지가 기세 좋게 피어올랐다.

 

시야를 가린 누런 흙먼지가 가라앉으면서 맨 먼저 약방 유리창으로 보이는 것은, 길 건너 극장 건물의 지붕과 처마 밑의 확성기였다. 그리고 극장 간판의 그림들이 보였다. 카우보이 모자에 쌍권총을 든 사나이, 화약 연기가 피어나는 총구를 자기 코 가까이 대고 냉혹한 미소를 짓는 사나이, 어머니나 숙모처럼 파마머리를 한 여배우들......


극장의 확성기에서는 손님을 불러 모으는 선전 방송이 쩌렁쩌렁하게 터져 나오곤 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에서 나오는 음악과 대사가 그 확성기를 통해 흘러 나왔다. 우리는 그 소리만 듣고도 장면을 연상할 수 있었다. 



뜨물 할머니의 중매로 성사된 삼촌과 숙모의 결혼식은 그 극장에서 올려졌다삼촌 결혼 기념사진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신랑 신부와 주례, 그리고 남녀노소 하객들의 입성이 촌스러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념사진의 배경을 드넓게 차지한 대형 태극기가 귀순한 북한 '간첩'들의 기자 회견장 무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반공 의식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휴전 직후라서 예식장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의 회합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렇게 태극기를 강조했던 것일까? 어쩌면  전방 기지촌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 집안은 전쟁 때 이북에서 월남한 피난민들 아닌가? 대형 태극기를 내세워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장날이면 약방 손님이 많았다. 손님 중에는 평소에 보기 어려운 사람들도 많았다. 약값 대신 송이버섯을 내미는 산골 할머니도 있었고, 훈장을 단 군복 소매 끝에 번쩍이는 갈고리가 삐죽 나와 있는 상이군인들이 연필을 팔러 오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좁은 약방 안에 앉아 버틸 수가 없어 약방 유리문 앞에 나와 앉아 있곤 했다.

 

추석 대목장이었을 그날, 나는 좀 이상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키가 컸으며 한 겨울에나 입는 낡은 외투 차림에 계급장 없는 육군 작업모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모자 밑으로 나온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을 듯 길었고, 수염도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다. 온 종일 먼지 이는 길을 걸은 사람처럼 너덜너덜한 장화는 물론 외투도 군모도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내가 처음 그를 발견했을 때는 아직 대낮이었다. 그는 사람들 뒤에서 목을 길게 빼고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고모네 집에 가서 한참 놀다가 왔을 때도 여전히 거기 있었다. 날이 서서히 어두워지는데도 그는 여전히 거기 서 있었다.

 

그는 외투 주머니에서 건빵 같은 것을 꺼내어 입에 넣고 씹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버스가 오면 그 동작을 멈추고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눈여겨보는 것이었다. 버스가 떠나면 다시 주머니에서 건빵을 꺼내어 씹을 뿐 그냥 그 자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생각했다.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군지가 궁금했다. 

 

해가 지느라고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어질 때 쯤 버스가 왔다. 버스의 조수가 막차라고 소리치면서 뛰어내린 후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내리는 사람도 많았고, 타려는 사람도 많아서 사람을 분간하기 어려운지 그 이상한 사람은 버스 앞으로 다가가 사람들 틈에 섞이는 바람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나 보았다. 버스가 떠나고 먼지가 가라앉자 텅 빈 정류장에 그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는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지르고 국도를 따라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그의 긴 그림자가 국도에 납작하게 엎드려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그가 누구인지, 누굴 기다렸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냥 멀찍이 그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는 마을을 벗어나 싸리 고개에 이르자 국도를 버리고 청계산 쪽 샛길로 접어들었다. 이제 길에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와 그 뒤를 따르는 나 밖에 없었다.

 

터벅터벅 먼지를 일으키는 커다란 신발이 그를 저녁 이내 속으로 데려간 후 청계산 시퍼런 능선에서 달이 누런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누렇긴 해도 크고 둥근 달이었다. 행인이 없는 길에서 누런 달을 보고 무서워진 나는 달을 등지고 돌아섰다. 내 키만 한 그림자가 내앞에 누워 있었다. 나는 내 그림자를 쑥쑥 밀면서 그림자와 함께 걸었다.

 

달빛이 밝아지면서 길 위에 구르는 돌멩이들이 환하게 보였다. 콩고물 같은 먼지가 풀썩풀썩 일어서 발목을 적셨기에 구름을 탄 손오공이 된 기분이었다. 조금 추웠다. 길가 밭두둑 너머 외딴 집에서 저녁 짓는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솔가지 타는 냄새가 났다. 나는 시장기 비슷한 외로움을 느꼈다. 땀이 나도록 빨리빨리 걸어야 했다.

 

그 날이 그를 본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음에도 그에 관한 꿈을 여러번 꿨다.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국도 위에 선명하고 긴 그림자를 밀면서 나타난 그는 나에게 건빵을 건네기도 했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그의 표정은 웃을 때도 쓸쓸했고, 그의 손길은 축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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