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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사막은 슬픔 저장소이니 마른 모래에 눈물을 파묻어야지요. 사구가 바람에 움직이며 내는 소리는 실연당한 자가 우는 소리. 형과 나는 부추밭에 누워 말러 교향곡 4번을 들었다.

[박인 스마트 소설] 고비 주막

2019. 09. 20 by 박인 작가
▲수십 킬로미터가 한눈에 들어오는 초원에서는 한 번쯤 목 놓고 울어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이시백
▲수십 킬로미터가 한눈에 들어오는 초원에서는 한 번쯤 목 놓고 울어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이시백

별똥별이 쏟아지는 초원의 밤. 몽골 고비사막 짙푸른 밤하늘에는 별똥별들이 질주했다. 비가 내린 초원은 온통 부추밭 천지였다. 푸르공 트럭을 타고 사흘을 달려도 계속 부추밭이었다. 흰 부추꽃 냄새와 야생화 향기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시골 상점에서 산 유기농 밀가루에 부추를 잘라 넣고 부추전을 부쳤다면 누가 믿겠는가. 사막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부추밭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수십 킬로미터가 한눈에 들어오는 초원에서는 한 번쯤 목 놓고 울어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래야 그간 막힌 가슴의 응혈이 풀려 시원해질 거라고. 아니면 캄캄한 별밤에 알몸으로 일어나 사막을 달려보기를 권했다. 물론 농담이지만, 벗고 달리기엔 사막은 시작도 끝도 없이 광활하였다.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숨이 턱에 차서 쓰러질 때까지 사구를 달려보았다. 지쳐 쓰러지자 멀리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형의 하얀 머리가 어린 왕자처럼 연보라 목도리를 따라 바람에 날렸다. 피곤한 사막여행자를 위해 형과 나는 게르 안에서 주막을 열었다. 나를 처음 보자마자 형은 뜬금없이 부추전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시원의 공간인 초원에 널린 부추를 따서 전을 부쳐 먹자는 제안에 호탕하게 웃으며 재료를 준비했다. 고비사막 여행을 온 사람들은 제각기 사연이 많아 보였다. 밤이 오자 게르 방장인 나는 여행용 간편 조리도구 일체를 펼치고 간편 요리를 만들었다. 보드카를 들고 주막에 찾아온 도반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주막은 저녁 술기운에 취해 듣는 고해성사 장소인 셈이었다.

-우리 일행 외에도 정말 많은 사람이 사막을 찾아왔더군요. 황무지에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면 상념이 사라지기도 하죠. 사구를 걷다 보면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더 큰 모래언덕을 기어오르게 되고요. 바람에 묻혀 사라지는 발자국을 남기고 가는 거죠. 언덕 너머에 바다나 신기루가 있을 것 같았죠. 제일 높은 모래 산에 오르면 보이는 끝없는 모래 바다와 저 멀리 사구에서 들리는 바람의 노래뿐이었죠. 사는 게 별거 있습니까. 결론은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쓰고 즐기다 죽는 게 상책이란 말씀.

사막에 와서 보드카를 마시며 스스로 용서를 비는 주막의 밤! 사막에서는 정말로 목이 말라서 술이 술술 들어갔다. 밤에 비가 내려 춥기도 하고 갈증 때문에 보드카를 물처럼 마셨다. 평소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던 이들도 어느 순간 초원에 방목한 양떼처럼 자신들을 풀어놓았다. 남의 살아온 이야기를 자연스레 들었다. 가족사도 풀어놓아야 할 범주에 속하기에 털렸다. 천인공노할 남편, 패악질 시어머니와 바람피운 이야기가 재미로 치면 요즘 끝장 드라마는 저리가라였다.

▲모래 산에 오르면 보이는 끝없는 모래 바다와 저 멀리 사구에서 들리는 바람의 노래뿐이었죠. ⓒ이시백
▲모래 산에 오르면 보이는 끝없는 모래 바다와 저 멀리 사구에서 들리는 바람의 노래뿐이었죠. ⓒ이시백

사막이나 초원에서 그런 개인사 이야기를 하고 들으면 어느 정도 치유가 되는 모양이었다. 사막과 초원의 주술적 힘이 이야기를 먹어치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잠깐 떠나온 고국에서 벌어지는 서로 짓밟고 모욕하고 물어뜯는 뉴스가 더 막장이 아닌가. 원래 막장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에서 땀 흘려 일하는 신성한 공간이다. 불행과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이 절대 아니었다. 웃음으로 갈무리되는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저녁마다 나는 김치전, 감자채전, 수제비, 떡국, 얼큰 칼국수, 삼겹살과 햄 소시지구이를 안주로 내놓았다. 보드카를 마시기 위해 몽골 시골 마을에서 구한 음식 재료와 서울에서 가져온 즉석식품으로 요리를 했다.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은 별빛을 털며 고비 주막으로 고개 숙이고 들어오는 모든 순례자를 위해서.

그들 중 세 명의 여자가 주막의 단골손님이었다. 우리는 서로 별명을 짓고 부르기로 했다. 만나면 나도 모르게 웃게 하는 마리아, 어느 순간 우리 곁에 와 편안한 말동무가 되어주는 버들이, 취하면 자유로운 춤사위를 펼치시는 주모님이 그들이었다. 주방장인 내가 바빠서 그네들이 서로 술을 따르거나 보살펴야 했다. 한두 번 주막을 차리니 모두 형제자매처럼 친해졌다.

어느 날 그중 한 여성 도반님이 울고 있다가 웃는 것인지 웃고 있다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리아였다.
-왜 울어요?
내가 물었다. 고비로 오기 몇 달 전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이가 죽었다고 이제 대놓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슬픔이 얼마나 뼈에 사무치고 한이 맺히면 우는 얼굴이 웃는 얼굴처럼 보이는 걸까.

-뼛가루를 조금씩 가져와서 뿌렸어요. 사막에 여행을 가기로 했거든요.
-사막은 슬픔 저장소이니 마른 모래에 눈물을 파묻어야지요.

이야기를 듣고 앉아있던 형이 말했다. 우리에게 술 취한 형은 사제와 같았다. 내뱉는 말이 마음의 위안이 되고 그대로 시가 되는 기분이랄까. 이번에는 자칭 주모가 고백했다.

-평생 속 썩인 원수 덩어리와 갈라서고 그 기념으로 놀러 왔어요.
-왠지 마두금 타는 소리처럼 측은하네.

젊은 여자 버들이도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웠습니다. 미워죽을 것 같아서 파혼을 결심하고 사막으로 왔어요. 제가 이놈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사구가 바람에 움직이며 내는 소리는 실연당한 자가 우는 소리.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리입니다. 자고로 사랑은 칼로 물 베기라던가.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문밖에서 부는 비바람은 게르 천막을 두드렸다. 저마다 안고 가는 슬픔은 이제 내려놓고 자 건배! 일일이 응대하기도 귀찮아서 나는 건배를 제안했다.
그런데 말이다. 처음부터 아무 말도 안 하고 구석에서 보드카를 연거푸 마시고 있던 늙은 사내가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난 충정훈련을 받고 출동한 공수부대였지.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였어. 난 아무래도 민간인을 조준해서 쏠 수가 없어 허공에 갈겼어. 시체를 트럭에 실었지. 아직 숨이 붙어있던 여자가 살려달라는 마지막 피에 젖은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네.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말 등에 올라타고 부르는 독특한 허미 발성 같았다. 나는 들고 있던 보드카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이라는 보물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오늘 진실 앞에서 눈 감고 말 없는 우리가 모두 가해자입니다.

이 또한 사막에 부는 바람처럼 지나갈 것이니 이번 고비를 잘 넘기를 바란다고 형이 말했다. 고비사막 날씨는 변덕이 심했다. 바람결에 비가 흩뿌리는가 싶더니 우박이 내리고 있었다. 게르 천막 지붕을 두드리며 내리는 우박 소리는 치유의 음악이었다. 수백 개 작은북이 울었다. 마지막 수제비가 끓고 있었다. 사람에게 질려서 애인에게 차여서 그냥 세상이 싫어서 고비까지 온 도반들에게 바치는 마지막 안주였다. 술이고 뭐고 나는 피곤해서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형도 지병인 심장병 때문에 피곤한지 마지막 건배를 제안했다.

-그저 함께 지낸 고비의 시간이 이따금 돌아보는 빛바랜 기억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외로울 때마다 고비사막의 쓸쓸함이, 힘들 때마다 지나간 시절의 불편하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위로로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건배!

초원에서 보낸 마지막 날 밤, 형과 나는 부추밭에 누워 말러 교향곡 4번을 들었다. 무수한 별빛 장엄한 밤하늘을 보며 다음 삶을 잠깐 생각했다. 별을 헤아리다 보면 나이를 잊고 천국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걸까. 서울로 돌아가 마주칠 생활도 더 피폐하지 않기를 빌었다. 이번 생이 지옥이면 어떻고 천국이면 어쩌랴 싶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칭기즈 보드카 반병이 내 손안에 있었으니까. <끝>

스마트 소설은 짧은 시간에 대중 영상 매체인 스마트폰으로 읽는 소설입니다. 눈으로 빠르게 읽고 머리와 가슴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박인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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