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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3학년에 올라간 내게 큰누나는 모자를 선물했다. 나는 문틈으로 깊은 마당 안을 내려다보았다. “뭘 사주면 늘 잃어버려요. 애가 약간 모자라나 봐.”

[박인 스마트 소설] 빨강 빵모자

2019. 10. 04 by 박인 작가

큰일 났네. 모자를 잃어버렸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허전한 머리를 어루만지다가 알았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언덕길 노란 들꽃을 보다가 현기증이 났다. 하늘이 노래져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큰누나에게 혼날 생각에 나는 허둥거리며 오던 길을 돌아서 내려갔다. 3학년에 올라간 내게 큰누나는 모자를 선물했다. 모자 가운데에 꼬투리가 삐죽 달린 빨강 빵모자. 심약한 내게 힘이 되어준 빨간 베레모.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산동네 언덕길을 내려오다가 마주친 미친 바람결에 하늘로 날아갔을까. 날아오른 모자를 까치가 물고 간 것일까. 미루나무 까치집을 올려다보았다. 마법에 걸린 모자가 빨간 새가 되어 날아간 것일까. 교회 첨탑에 구름이 걸려 있다. 교회 문을 열고 컴컴한 안을 들여다보았다.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에 빵과 떡을 공짜로 나눠주었다. 창피하지만 그것을 먹기 위해 교회에 갔다. 교회를 보면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The Tree of Karma-Day』 1120×1450㎜, Acrylic & Mixed media. 박인作
▲『The Tree of Karma-Day』 1120×1450㎜, Acrylic & Mixed media. 박인作

초등학교 교실은 문이 잠겨있었다. 창문 틈으로 내가 앉았던 책상과 의자를 살펴봤지만, 모자는 없었다.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할까, 하고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이런 일을 혼자서 잘 해결하는 어린이가 되고 싶었다. 상필이와 싸운 일도 혼자 잘 해결해야 했다.

나는 오늘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려고 애를 썼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 앞에서 물방개 놀이를 하는 아저씨가 가져갔을까. 깡통을 잘라서 만든 작은 수영장 물통에서 물방개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미니 수영장 가장자리에 있는 여러 칸막이 중 한 곳으로 물방개가 들어갔다. 번호가 적혀 있는 칸마다 맛있는 초콜릿 과자, 멋진 로봇 장난감, 비싼 캐릭터 피겨 등이 상품으로 걸려 있었다.

“이제 그 빨간 모자를 걸고 한 번 해보지 않을래?”
아저씨가 돈을 잃은 내게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기면 여기 있는 모든 것 가져갈 수 있다. 물방개에게 소원을 빌어봐.”

전에도 몇 번 했지만 거의 허탕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 틈에 껴서 물방개 수영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물에 내 혼이 빠지기 직전에 일어섰다. 문방구 옆에 떡볶이집이 있다. 맛있는 떡볶이를 침을 삼키며 보다가 모자를 잃어버린 것일까. 돈을 내고 좌판에서 일인분 다섯 개만 집어먹어야 하는데 늘 나는 눈치를 보며 여섯 개를 먹었다. 주인 할머니는 아예 내다보지도 않았다. 알고도 모른 척했다. 너무 매워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려고 모자를 벗어버린 것일까. 새벽에 일어나서 잠든 큰누나 몰래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그 훔친 돈으로 오락실에 가서 게임을 했다. 게임 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모자를 두고 온 것일까.

아니면 상필이가 가져갔을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놀리며 내 귀를 잡고 교실과 복도를 끌고 다니던 상필이가 눈독을 들이던 내 모자. 내 뒤에 앉아 내 모자를 뺏어 쓰고 시시덕거리던 상필이. 보다 못한 내 단짝 선옥이가 선생님께 일러바친 후에야 나는 모자를 돌려받았다. 뾰족한 연필로 내 등을 찌르고, 쉬는 시간에 레슬링 내 목을 조르는 기술을 선보이던 나쁜 놈. 친구가 아니라 원수였다. 덩치가 큰 그 아이가 무서워서 학교에 가기 싫었다. 다른 친구들 물건도 빼앗거나 훔치던 그 상필이가 내 모자를 가져간 것일까.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나는 모자를 찾으러 학교 건너 산동네에 사는 상필이네 집으로 갔다. 모자를 꼭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찻길을 가로지르다 차에 치일 뻔했다. 운전사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욕을 했다.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산길을 올랐다. 목이 마르고 거의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상필이 집은 산동네 맨 꼭대기 판잣집 촌에 있다. 너덜거리는 루핀을 씌운 지붕 낮은 집에 사는 사람 목소리는 밖에서 잘 들렸다. 천막으로 만든 문 안에서 카랑카랑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문틈으로 깊은 마당 안을 내려다보았다. 등진 어른의 비쩍 마른 손에 빗자루가 들려있다. 언젠가 본 상필이 아버지는 병치레로 두 눈이 푹 꺼져있었다.

“이 빨간 모자 누구건대 가져왔니? 길에서 주워왔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폐가 나빠서 기침을 연신 하는 아버지에게 상필이는 두 손으로 빌고 있었다. 악질처럼 나를 괴롭히던 아이가 울고 있었다. 나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산길을 내려왔다.

“빨간 베레모 어디 있니?”
저녁에 퇴근한 큰누나가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뭘 사주면 늘 잃어버려요. 애가 약간 모자라나 봐.”
누나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몸살이 나서 온몸이 불덩이처럼 열이 났다.

그날 밤, 빨강 모자는 길거리에 낙엽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지붕 위에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뛰어다녔다.
철새처럼 날아가다가 뒤처져서 산동네에 내려앉았다.
담벼락에 도둑처럼 붙어있다가 그림자가 되었다.
동네에서 제일 높은 교회 첨탑에 걸려 펄럭거렸다.
이윽고 하늘로 날아가서 예수님 좌편에 떨어졌다. 예수님이 빨강 빵모자를 주워 가시면류관처럼 가슴에 대고 빈 손가락으로 이거냐고 물어보고 계셨다. 가슴에 흐르는 피를 보자 나는 다시 아주 큰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끝>

스마트 소설은 짧은 시간에 대중 영상 매체인 스마트폰으로 읽는 소설입니다. 눈으로 빠르게 읽고 머리와 가슴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박인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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