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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성 수필]

아버지는 우리 형제를 시체실에 가두고 자물쇠를 채우는 방법으로 징벌하곤 했다. 한 번은 시신이 안치되어 있을 때 우리 형제를 가뒀다. 나는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보며 누군가 구해 주러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는데 동생은 겁도 없이 시신의 주머니를 뒤져 돈을 찾아내었다.

[ 11 ] 삼팔 이북의 낯선 세상

2019. 10. 23 by 김홍성 시인
ⓒ김홍성 

 

가족들이 먼저 이주하고나는 2학년을 마저 마친 이른 봄부터 살게 된 동네에는 미군과 태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 전에는 삼팔선 이북 땅이었던 마을 어귀에는 인공(人共) 치하에서 만들었다는 해방탑이 반 쯤 파괴된 채 남아 있었다해방탑 서쪽은 꽤 너른 들이 펼쳐져 있고, 들이 끝나는 곳을 감돌아 흐르는 시냇물은 한탄강으로 합류했다. 사단 규모의 미군 부대는 바로 그곳 한탄강을 끼고 있었다.

 

새 학교는 전 학교에 비해 학생 수가 몇 배나 많았다. 주둔군에 의해 이루어지는 흥청망청한 특수(特需)를 보고 전국 각처에서 몰려든 인구로 인해 학생 수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한탄강 쪽 미군부대 근처에 있었던 학교는 윗동네의 태국군 부대 옆 산기슭으로 옮겨 앉으면서 학급수를 대폭 늘렸다. 그래도 교실이 모자라 곧 2부제 수업을 했고 나중에는 학교가 하나 더 생겼다.

 

아버지의 병원도 그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컸다. 현관이 버스 정류장으로 통하는 전면은 목조 이층이었으며, 전에 없던 엑스레이도 들여 놓았고, 엑스레이를 위한 커다란 발전기도 있었다. 병원 이층은 입원실이었는데, 입원실은 병원 후문으로 이어진 안채에도 있었다.

 

안채는 장독대와 우물을 가운데 두고 여러 개의 방들이 자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 중 다섯 개의 방이 입원실이었고, 입원실들을 마주 보는 큰 방 하나가 우리 여섯 식구들이 함께 쓰는 안방이었다. 부엌은 입원실과 안방 사이에 있었고, 두 칸짜리 변소가 뒷문으로 나가는 통로 왼쪽에 붙어 있었다.

 

이사한 이듬해엔가 아버지는 병원 뒷문 밖에 단층집을 한 동 더 지었다. 그 집은 미군을 상대로 하는 위안부들을 정기적으로 검진하는 성병진료소가 되었다. 검진은 매주 주중에 두 번 했는데, 검진하는 날이면 진료소 마당에 위안부들이 길게 줄을 섰다.

 

술이 덜 깬 여자들도 있었고, 잠이 덜 깬 표정의 여자들이 줄 선 채로 색다른 냄새가 나는 담배를 돌려 피우기도 했다. 진료소 마당의 화단에 맨드라미가 줄지어 피어있던 어느 날, 거기서 어정거리는 동생들과 나에게 미제 껌을 하나씩 나누어 준 어떤 여자는 나만 불러서 귓속말을 했다.

 

-너 이 담에 크면 꼭 나를 찾아 와라. 내가 네 총각 딱지를 떼어 줄 거다. 알았지?

이러고는 깔깔깔 웃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맨드라미처럼 노랗고 빨갰다.

 

진료소 옆에는 컴컴한 창고가 붙어 있었는데, 그 컴컴한 창고를 우리는 시체실이라고 불렀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손 써 볼 사이 없이 숨을 거둔 사람들을 임시로 안치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를 시체실에 가두고 자물쇠를 채우는 방법으로 징벌하곤 했다. 한 번은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우리 형제를 가뒀다. 나는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보며 누군가 구해 주러 오기를 기다렸는데 동생은 겁도 없이 시신의 주머니를 뒤져 돈을 찾아내었다.

 

그 때 마침 다니러 오셨던 고모가 우리를 보러 시체실 앞에 왔을 때 동생은 그 돈을 문틈으로 내밀며 만화 좀 빌려다 달라고 했다. 고모로부터 이 일을 전해들은 아버지는 시체실 자물쇠를 열었고 그 뒤로는 우리를 시체실에 가두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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