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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성 수필]

아이들이 공차기를 하는 동안 나는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전에 다니던 학교와 마을과 동무들을 생각했다. 그 마을에 남은 작은 아버지와 고모 내외를 생각했다.

[ 12 ] 새 학교

2019. 10. 27 by 김홍성 시인
ⓒ김홍성 

 

 

새 학교에서의 3학년 시절은 기억나는 게 많지 않고 혼란스럽다. 자주 두통이 왔으며, 어지럽고 팔다리에 힘이 없었다. 체육 시간에는 혼자 교실에 남아 유리창 너머로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뛰노는 아이들을 멀거니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날은 철봉대 앞에 줄지어 앉아 턱걸이 시험을 보는데, 나는 맨 뒤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이 턱걸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 때까지 턱걸이를 한 번도 못하는 아이였기에 곧 닥쳐올 창피를 무릅쓸 일에 조마조마했다.

 

철봉대 너머로는 봇도랑이 있었다. 이 봇도랑의 물은 1920 년대에 만든 산정리의 저수지에서 흘러왔다. 지금은 학교 앞 봇도랑 둑이 시멘트 콘크리트로 바뀌었지만 전에는 그냥 떼를 입힌 흙이었다.

 

나는 머리에 물을 묻히려고 물가로 내려갔다. 내 턱걸이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그 때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머리에 물을 묻히기도 전에, 그러니까 그 물에 두 손을 담그자마자 이상스런 기운이 내 몸 안으로 쑥 들어오는 것 같았다. 두 손으로 움킨 물을 머리에 몇 번인가 끼얹고 봇도랑 바로 위 철봉대로 갔을 때는 마침 내 차례였다.

 

나는 이전과는 달리 아무 거리낌 없이 철봉대에 매달려 턱걸이를 시작했는데 열 번이 넘을 때까지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턱걸이를 스무 번도 넘게 했다. 마지막 몇 번은 반 아이들이 구령을 붙여 주며 격려했다. 내가 철봉대에서 내려서자 박수를 쳤다.

 

그 때 한 번 뿐이었다. 달리기나 공차기 혹은 공 던지기 등에는 번번이 꼴찌였다. 봇도랑에 내려가 그 물을 손에 움켜서 머리에 묻혀 봐도 더 이상 힘이 솟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공차기를 하는 동안 나는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전에 다니던 학교와 마을과 동무들을 생각했다. 그 마을에 남은 작은 아버지와 고모 내외를 생각했다.

 

토요일에는 시외버스를 타고 옛 동무들과 친척들이 사는 기산리 마을로 놀러가곤 했다. 나는 맨 앞의 조수석을 좋아했다. 버스는 남쪽으로 내려가 이승만 정권 때 세웠다는 비석이 서 있는 '북진통일로앞에서 좌회전하여 시냇물을 따라 달렸다. 전쟁 전에는 그 시냇물이 삼팔선이었다.

 

시냇물은 내가 살던 동네에서 나를 마중하기 위해 흘러오는 듯했다. 아직 동네에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기분이 좋았다. 버스는 영평천 시냇물을 거슬러 삼팔교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달리다가 이윽고 싸리 고개를 넘으면 옛 마을이 나오는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두 동네를 오가며 차창으로 시냇물을 바라보던 시절은 참 좋은 시절이었다춘천과 철원을 잇는 유일한 노선 버스였던 그 버스 운전기사의 모습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마른 얼굴에 안경을 썼던 그 아저씨는 거의 노인이 될 때까지 그 버스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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