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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시 당국 공무원이 내 후추나무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누가 죽은 후추나무의 복수를 해 줄 것인가. 꿈속에서 나무 인간이 된 나는 숲의 나무들에 소리쳤다.

[박인 스마트 소설] 후추나무

2019. 10. 18 by 박인 작가

은하수 별빛이 아름답게 흐르는 밤 풍경 속에 후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는 이 후추나무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사랑이 반드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생기란 법은 없지 않은가. 내가 태어난 해, 그러니까 50년 전, 아버지는 어린나무 한 그루를 기념으로 심었다. 그날 이후 질긴 생명의 뿌리가 부드러운 흙을 뚫고 뻗어 나갔다. 사실 나는 이 후추나무를 아주 잘 보살폈다. 주변에 고랑을 만들어 물이 잘 빠지도록 했고 봄가을 퇴비를 주었다. 해충을 제거하고 가지를 잘라주어 곧게 자라도록 했다. 어린 후추가 젊은 나무로 자라나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다. 그 후추나무 아래 내가 사는 오두막 한 채가 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후추나무 긴 그림자가 내가 잠든 방 창문을 감싸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나무는 사색할 수 있는 그늘을 내게 만들어 주었다. 내가 키운 후추나무는 캘리포니아가 원산지였다.

▲나무들은 2500년 이상을 살아남아 나를 기억하겠지. ⓒ박인
▲나무들은 2500년 이상을 살아남아 나를 기억하겠지. ⓒ박인

원래 인도 남부가 원산지인 후추나무 열매, 후추는 세계사 흐름을 바꾼 향신료였다. 후추를 손에 넣기 위한 십자군 전쟁이 지중해에서 벌어졌다. 오죽하면 후추를 못 먹어 죽은 사람은 없어도 후추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셀 수 없다고 했던가. 대항해시대에 접어들어 후추는 병을 쫓고 부를 상징하는 향신료로 등극했다. 한때 금보다 후추의 몸값이 높았다. 비잔틴제국이 무너지자 후추 한 주먹은 노예 10명의 가격과 맞먹을 정도였다. 때를 잘 만나야 좋은 대접을 받는 법. 누린내 나는 생고기에 뿌려 맛과 향미를 좋게 만드는 후추는 귀족들의 과시용 사치품이었다. 덜 익은 열매를 볶아서 검정 후추를 얻고 잘 익은 빨간 열매로는 흰 후추를 얻었다. 음식에 금을 뿌려 먹는 것과 마찬가지랄까. 후추는 금고에 보관했을 정도였다. 후추는 ‘고작 양념인 주제’가 아니라 ‘후추를 얻는 자 세계를 얻으리라’였다. 인간의 탐욕이 후추를 흔한 양념으로 전락시켰다.

2년 전, 시 당국 공무원이 내 후추나무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베어버리거나 옮겨 심으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생명력이 강한 나무뿌리가 집 앞 도로 아스팔트를 뚫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인류역사상 최고의 향신료인 후추를 선사해온 나무에 사망 선고라니. 나무뿌리를 뽑는 일은 목을 졸라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 후추나무가 아스팔트 길을 뚫고 나오는 것은 나무로서 자연스러운 삶이 아닌가. 나무를 베고 뿌리를 파내지 않으면 도로복구 비용과 제거 비용을 모두 청구하겠다는 공무원 나리의 생각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일까.

나는 어린 시절부터 돌보고 기른 후추나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나는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후추나무를 없애라는 공무원들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동안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나무 제거 명령 기일을 미루었다. 공무원들도 나무보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더 사랑하지 않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나무를 훈련해서 홀로 걷게 만들기 전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법규를 읊조리는 냉정한 담당 공무원 앞에서 나는 주눅이 들었고 후추나무 걱정으로 얼굴에 주름살마저 늘었다. 나무 한 그루의 생명도 내 맘대로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제거 명령 지정일 전날 나는 인부들을 불렀다. 장의사를 부르는 심정이었다. 차마 내 손으로 후추나무를 죽일 수는 없었다. 나무는 세월의 나이테를 드러내고 쓰러졌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도 후추나무는 살아남기를 바랐다. 내가 없는 미래 세계는 좀 더 특별하고 재미날 것이 아닌가. 올해 새로 뽑힌 시장님은 사랑하는 나의 후추나무를 되살려낼 수 있을까. 누가 죽은 후추나무의 복수를 해 줄 것인가. 내가 나무 인간이라도 되어야 하는가.

꿈속에서 나무 인간이 된 나는 숲의 나무들에 소리쳤다. 대지의 주인은 나무. 흙에 뿌릴 내리고 사는 나무. 포장도로를 만드는 인간이 아니라 지구의 주인은 나무. 떠돌며 유랑하는 부평초 인간이 아니라 오늘도 베이고 불태워지는 우리들의 나무. 평생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내가 죽은 이후에도 천 년을 살아 땅을 지키는 나무. 후추나무는 젊은 청년처럼 튼튼하게 성장하여 뿌리를 넓혔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는 지붕을 만들고 쉬는 사람들을 품어주었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를 뿌리째 뽑다니. 내 육신 같은 후추나무 허리를 전기톱으로 잘라버리다니.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나는 나무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공무원들은 저 푸른 나무들의 생명을 왜 앗아가려고만 하는가. 수많은 나무를 자르고 고작 스키장을 건설한다는 말인가. 죽은 후추나무의 원혼을 달래려고 나는 시장님께 편지를 보냈다.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시장님 귀하. 당신들은 내 후추나무에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내 사랑은 죽고 말았지요. 톱질로 가지와 몸통을 자르고 밑동과 뿌리를 파헤쳤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우는 나무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당신이 만든 도로망 확충 계획과 도시개발 청사진은 이제 그 대가를 지급할 것입니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내가 이 도시 발전에 기여할 나름대로 계획을 시행했습니다. 이제 나는 막 그 열매와 과실들을 수확할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나무들을 살려주십시오. 당신이 전혀 모르는 일이라면 부하 공무원을 시켜서라도 당장 살려주세요. 이만.

어둠이 몰려오는 저녁 무렵, 나는 접이식 삽과 1년생 묘목들을 배낭에 챙기고 도시 한 가운데 숲으로 갔다. 후추나무를 기리기 위해 그간 나는 160그루 어린나무들을 사서 심었다. 거대한 나무로 자라날 50그루의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와 100그루의 자이언트 세쿼이아와 10그루의 바오바브나무를 한밤중에 몰래 심었다. 2000살까지 거뜬히 사는 바오바브나무는 이곳 겨울 날씨에 한 해를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최대 2700살까지 살아갈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와 자이언트 세쿼이아 나무들은 잘 자라고 있다. 나는 이 어린아이들을 관공서 주변 공원들과 시 소유의 공터에도 심었다.

지금 이 시각 나무들 뿌리는 땅속을 파고들어 자신의 삶터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나무들은 최소 30m에서 90m까지 살아있는 거인들로 자라날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는 시청 정문 앞 공터에 웅장한 나무가 자라나는 것을 볼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나무들은 내년쯤 그늘 쉼터를 만들어 줄 것이고 시민들은 그 아래서 낮잠을 즐기거나 더위를 피해 쉬어 갈 수 있겠지. 나는 죽는 날까지 나무를 심을 계획이다. 나무들은 2500년 이상을 살아남아 나를 기억하겠지. 오늘 나는 나무 두 그루를 시장 저택 담장밖에 심을 작정이다.

시장님, 이미 당신 저택 둘레에 힘이 센 열 그루 거인들을 박아놓았습니다. 그 나무들을 제거하려면 돈이 좀 필요할 거예요. 공무원인 당신은 언젠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겠지요. 거인으로 성장한 나무뿌리가 당신들 집 지하실을 파헤치며 들고 일어서도 놀라지 마십시오. 우선 오늘까지 162그루 나무를 심는 것으로 후추나무를 향한 내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후추나무를 위한 나만의 복수를 시작한 셈이랄까요. 그러나 정말 매운 맛은 이제부터입니다. 기대하세요! <끝>

스마트 소설은 짧은 시간에 대중 영상 매체인 스마트폰으로 읽는 소설입니다. 눈으로 빠르게 읽고 머리와 가슴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박인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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