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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성 수필]

나는 살림하는 남자도 아니고 항아리 수집가는 더욱 아니다. 그러나 항아리가 그 실용성과 함께 어떤 정물이나 풍경으로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 반갑고 푸근하다. 가끔 햇볕을 쬐어야 하는 고추장 된장 간장 항아리는 앞 베란다에, 쌀과 소금 항아리는 그늘진 뒷베란다에 놓아두고 듬직하게 여기는 정도의 항아리 애호가이기는 하다.

[ 19 ] 옹기의 추억 1

2019. 11. 25 by 김홍성 시인
ⓒ김홍성 

 

봄볕 속에 장독들이 수두룩하게 나와 있었다. 그것은 팔려고 내놓은 물건들이 아니라 아파트 마당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동 장독대의 장독들이었다. 입주한 세대마다 하나 둘 조심스럽게 내놓고 정갈하게 갈무리하는 살림으로서의 장독들이었다.

큰 독은 맨 뒤에 중간 독은 중간에 작은 독은 맨 앞에 세대별로 조르르 놓여서 마치 잔칫날 가족사진 찍으려고 모인 옛날 식구들 같았다. 아파트에 살망정 푸근하고 소박한 살림을 사는 사람들이 이룬 진풍경이었다.

살던 집 전세가 갑자기 크게 오르는 바람에 싼 집을 찾아 나섰던 우리는 그 진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채송화가 피어나는 화단, 하얀 이불 호청이 바람에 너울대는 긴 빨래줄, 먼 산 푸른 하늘의 꽃구름 .......

그 조촐하고 오래된 서민 아파트 마당에 우리 항아리들도 같이 내놓고 살아보고 싶었던 우리는 군청 부근의 부동산 중개소를 찾아갔다. 가게 지키는 영감님이 전화를 한 뒤에 나타난 사장님은 내 말을 듣더니 약간 실망한 어조로 대답했다.

, 그 아파트는 통 거래가 없네요. 몇 년 기다려 본다면 모를까. 정 그 동네가 좋으면 그 뒤에 새로 지은 고층은 어때요? 거긴 매물이 많이 나와 있어요.”

새로 지었다는 그 고층 아파트는 장독들이 마당에 모여 있는 서민 아파트를 덮칠 기세로 흘립해 있었다. 전세금도 당시 우리가 살던 아파트 전세금의 배가 넘었다. 그렇게 살벌한 모습의 새 고층 아파트가 오래 되어 오히려 편안한 모습의 저층 아파트보다 비싼 이유를 수긍할 수 없었다.

우리는 또 다른 서민 아파트들을 찾으러 양구 시내를 뒤졌다. 그러나 양지바른 마당에 장독들이 소담스럽게 늘어선 아파트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애당초 우리는 양구와 인제 원통을 거쳐 속초까지 가 볼 요량이었다. 여차하면 도중에 하룻밤 잘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 날로 돌아왔다. 노부모가 사는 본가에서 수 백리나 떨어져 살 수는 없다는 제법 효성어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팔순 지낸 뒤부터 일손을 놓은 어머니는 재작년에 이르러서야 장 담그기를 그쳤다. 그래서 장독대에 빈 독이 많이 생겼다. 그 중 몇 개를 이사 나올 때 안아 든 데 이어 최근에도 조그만 항아리 몇 개를 안아 들었다. 어머니는 나더러 아들이면서 딸들보다 살림 욕심이 더 많다며 웃었다.

항아리가 아까운 게 아니라 이제 쓸모없이 버려질 수도 있는 집안 살림을 챙기는 아들이 기특하게 여겨졌으리라. 나중에 가져온 항아리 두 개 속에는 어머니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된장과 제수의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찹쌀고추장을 담았다. 다른 항아리에는 어머니가 직접 마른 북어 두 마리를 통째로 넣고 새로 달인 간장을 담았다.

나는 살림하는 남자도 아니고 항아리 수집가는 더욱 아니다. 그러나 항아리가 그 실용성과 함께 어떤 정물이나 풍경으로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 반갑고 푸근하다. 가끔 햇볕을 쬐어야 하는 고추장 된장 간장 항아리는 앞 베란다에, 쌀과 소금 항아리는 그늘진 뒷베란다에 놓아두고 듬직하게 여기는 정도의 항아리 애호가이기는 하다.

한 때는 마실 물도 항아리에 담아놓고 표주박 같은 것으로 떠먹으며 살고 싶기도 했다. 지금은 헐려서 자취도 없는 이삼십 년 전 인사동 어느 가게 구석에는 물동이가 오롯이 감춰져 있었다. 나무로 만든 덮개를 들추면 찰랑거리는 물 위에 표주박이 떠 있었다.

가게 주인 자매들은 그들의 친한 친구들이 오면 그 물을 표주박으로 떠서 차 우릴 물을 끓였다. 그 가게에 들를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물을 저렇게 떠먹으며 살아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나돌아 다니느라고 기회가 없었다.

인도나 네팔의 농촌 아낙네들은 여전히 물동이를 이고 물 길러 다녔다. 우물가에는 물동이를 인 여인들이 모여 들었고, 물동이를 내려놓고는 비녀를 빼서 입에 물고는 머리 타래를 고쳐 묶었다. 우리 어머니들도 옛날에는 소녀 때부터 부엌의 물독을 채우기 위해 수시로 물 항아리를 이고 다녔다. 발걸음 뗄 때마다 찰랑찰랑 하는 샘물을 머리에 이었기에 동네 어른을 만나면 비켜서서 눈만 내리 깔아도 참한 인사가 됐다는 얘기도 기억난다.

부엌의 물독에 물 길어다 붓는 풍습에서 생긴 우렁각시에 관한 옛날 얘기도 들었다. " 물독 속에는 우렁이가 살았더란다. 하도 오래 살아서 식구가 된 우렁이였더란다. 부엌살림을 어찌 잘 아는지 홀아비가 된 주인어른 밥상을 몰래 차려 놓고는 물독 속에 들어가 숨었더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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