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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성 수필]

노인은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설산 라카포시를 가리킨 후 두 손의 손가락을 모아 동그랗게 구부려 두 눈에 대고 망원경으로 산을 보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나는 노인의 손짓이 설산 라카포시가 아주 잘 보이는 집으로 안내하겠다는 뜻 임을 알아차렸다.

라카포시

2019. 10. 26 by 김홍성 시인

파키스탄 북부, 히말라야 기슭의 훈자 마을에 머물던 1993년초여름의 어느날, 버스를 타고 길기트 시내로 나갔다. 서울로 국제전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국제전화가 되는 호텔에 도착한 때는 아직 오전이었으나 밤이 되도록 전화 연결이 안 되고 있었다. 훈자로 돌아가는 막차도 떠나 버렸다. 결국 호텔에 투숙하고 한밤중까지 로비에 혼자 앉아 전화 연결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전화를 반드시 해야 하는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날 밤 꿈이 뒤숭숭하여 혹시라도 집에 무슨 일이 있지 않나 싶어 안부를 물으려는 것이었다.

여남은 명의 사내들이 호텔 문을 밀고 쏟아져 들어온 시각은 자정 무렵이었다. 파자마 같기도 하고 두루마기 같기도 한 전통 복장에 헐렁하고 긴 자켓을 걸치고 쇠똥 모자를 쓴 사내들이었다. 모두 수염이 길었다. 그 중 몇몇은 호텔 접수대 앞에 둘러서고 몇몇은 문 옆에 버티어 서고, 그 중 한 명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는 괜찮은 영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일본인이냐 ? 한국인이다. / 네 이름은 뭐냐? 김이다. / 직업은 뭐냐? 작가다. / 결혼은 했냐? 했다. / 자녀들은 몇이냐? 딸 아들 하나 씩 둘이다. / 여행중이냐? 그렇다. / 어떤 경로로 왔냐? 중국을 통해서 왔다./ 이제 어디로 가느냐? 아마 인도를 거쳐 네팔로 갈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문답식 대화가 오가다가 끊어진 직후라고 기억되는데 ...... 그 사내는 자켓을 살짝 제껴서 품에 감춘 기관단총을 보여주며 씨익 웃었다. 더럭 겁이 났지만 태연한 척 미소를 지으며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지에 대해서 재빨리 머리를 굴리는 중에 접수대 쪽의 사내가 손뼉을 마주쳐서 주목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 철수하자는 듯한 손짓을 했다. 내 옆의 사내는 알았다는 신호로 고개를 끄덕인 후 서두는 기색 없이 옷섶을 여미고 일어선 후 나를 내려다 보며 '굿럭'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일행과 합류하여 호텔 문을 빠져 나갔다.

그렇게 잠시 만났을 뿐인 그 사내의 인상을 나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훗날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된 '오사마 빈 라덴'과 동일 인물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용모가 닮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바로 '오사마 빈 라덴'일지도 모른다. 길기트는 아프카니스탄과의 국경 마을이며, 아프칸 내전 때 미군의 거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날 오전에 길기트에 도착한 나는 버스 터미널 앞의 한 고물상에서 미군 특수 부대의 헌 군복 더미를 발견했고, 그 중에서 내게 맞는 것을 한 벌 사두었다. 그리고 이런 군복이 왜 이런 곳까지 흘러왔는지를 물으니 아프칸 내전 때 흘러나온 것이라고 했었던 것이다. 나는 로비의 사내에게 그들이 누구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한통속일지도 모르는 자에게 그들의 신원을 묻는 것은 자칫 위험을 자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옷섶에 총기를 감춘 사내들이 호텔 로비를 떠난 후 전화가 연결되었으나 이내 끊어졌다. 몇 분 후 다시 연결되었을 때는 소리가 너무 멀었다. 결국 세 번 째 연결에 가서야 간신히 안부만 나누었다. 온가족이 모두 무사히 잘 있다는 것 외에는 기억에 남을 만큼 의미 있는 대화를 잇지는 못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데, 그깟 잘 있다는 걸 확인하느라고 긴 시간을 마음 졸인 것이 억울하고 허망하였는지 그날 밤도 뒤숭숭한 꿈을 꾸며 잠을 설쳤다.

다음날, 늦은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고 훈자로 돌아오는 도로는 나실아바드 마을 북쪽에 이르자 산사태로 막혀 있었다. 산 위에서 여전히 낙석이 떨어지고 있었다. 때로는 돌과 흙더미가 쏟아져 구름 같은 먼지가 피어올랐으며 때로는 그랜드 피아노만큼이나 큰 바위가 떨어져 굴렀다. 책가방이나 목침만한 돌들이 쏟아지기도 했으며, 꼭 누군가가 위에서 던지는 것 같은 돌멩이들이 핑핑 날아오기도 했다. 그 바람에 전신주가 꺾이면서 전화선도 끊어져 버렸다. 도로와 통신선의 복구는 사태와 낙석이 완전히 그쳐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낙석이 뜸한 틈을 타서 중간 중간 적당히 피신할 곳까지 냅다 달리는 방법으로 낙석 지대를 통과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험에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낙석에 팔이 부러져 소매를 적신 선지피가 꾸덕꾸덕 굳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끊어진 통신선을 연결하러 나온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했다.2.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길기트로 돌아갔지만 나는 그 마을에 남기로 했다. 기우는 해의 볕이 아직 쨍쨍한 비포장도로에 마지막 버스가 하얀 먼지를 뿜으며 달려간 후 나는 스적즈적 걷기 시작했다. 길기트에서 오는 길에 버스 차창 너머로 본 꽃밭이 화려한 도로변 식당에서 잠자리를 얻어 볼 작정이었다. 식당이 저만치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도로에 접한 산비탈 마을의 골목 어귀에서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리가 아주 짧은 난쟁이 노인이었다. 노인은 나에게 잘 곳을 알려 줄테니 따라 오라는 손짓을 했다. 노인은 내가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것을 알고 또 다른 손짓을 했다. 노인은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설산 라카포시를 가리킨 후 두 손의 손가락을 모아 동그랗게 구부려 두 눈에 대고 망원경으로 산을 보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나는 노인의 손짓이 설산 라카포시가 아주 잘 보이는 집으로 안내하겠다는 뜻 임을 알아차렸다.

노인이 들어간 도로변 골목은 산비탈로 올라서는 골목이었는데 돌계단으로 이루어졌으며 방목하는 가축의 분뇨로 질척했으나 얕은 담장을 두른 집집마다 아름다운 꽃나무들을 가꾸고 있어서 강렬한 햇살이 꽂히는 돌계단에 꽃그늘이 일렁였다. 난쟁이 노인은 그런 꽃그늘을 이룬 꽃밭이 있는 어떤 집 마당에 들어서서 그 집 식구들에게 수화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집의 가장인 듯한 흰 수염의 노인은 난쟁이 노인 뒤에 비켜 서 있는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난쟁이 노인은 돌아서서 빙긋이 웃어 보인 후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 계단 너머로 눈부시게 빛나는 설산 라카포시가 확 눈에 들어왔다. 라카포시와 나 사이에는 시야를 가리거나 풍경을 해치는 어떤 인공물도 없었다.

흰 수염 노인은 나를 어떤 방으로 데려가서 그 방에 있는 단 하나의 침대를 가리켰다. 내 짐작에 그 방은 흰 수염 노인의 방이며, 그 침대도 흰 수염 노인의 침대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방 그 침대에서 자고 싶지 않았다. 나는 흰 수염 노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그 집 지붕 위에서 자겠다고 고집하여 마침내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랐다. 지붕을 덮은 붉은 흙바닥에 앉아 설산 라카포시를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을 때 흰 수염 노인의 아들이 꼬질꼬질한 누더기 솜이불 두 채를 사다리를 통해 올려왔다. 이불 하나를 요 삼아 깔아 놓고, 다른 이불 하나는 요 위에 방석처럼 접어서 깔고 앉아 설산 라카포시를 바라보고 있자니 난쟁이 영감을 따라 온 것은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라카포시를 바라보다가 상단부의 눈 처마가 연달아 무너져 내리는 눈사태도 보았다. 산 위에서는 눈 처마가 잇달아 무너져 내리고, 산 밑에서는 눈사태로 인한 눈보라가 피어오르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그리고 약 10초 후에 들려온 굉음은 바로 그 눈사태가 일으킨 것이었다. 소리의 전달 속도가 만일 1초에 230 미터라면 그 집 지붕에서 산사태 현장까지는 약 2 킬로미터 정도가 되는 거였다. 산사태가 일으킨 굉음의 여운이 가시자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분홍빛 노을이 설산 라카포시를 물들이고 있었다.

밤이 되자 설산 라카포시는 푸르게 빛났다. 별들도 어느새 밤하늘을 꽉 메웠다. 별이 어찌나 많은지 주먹 한개 들어갈 틈도 없을 것 같았다. 찍하면 별똥이 떨어졌다. 나중에는 한꺼번에 두 세 개가 떨어지기도 하더니 더 나중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똥들이 라카포시의 어깨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어떤 별똥은 검은 실루엣만 보이는 이웃집 소녀들의 머리에 은비녀처럼 꽂히기도 했다. 그녀들도 잠자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와 침구를 펴는 중이었던 것이다. 별똥이 그렇게 많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은 그 날 처음 보았다. 별똥이 떨어지는 순간에 비는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기억해냈지만 나는 내 소원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노래 말에 나오는 소원인 통일을 빌기는 싫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바라보기나 하자는 생각을 했을 때 별똥은 여름날 소나기처럼 그치고 말았다.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 설산과 별, 정적 속에서 도란도란 들리는 이웃 지붕 소녀들의 음성…….이런 상황에서 쿨쿨 잘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얼핏 설핏 잠이 들기도 했지만 다시 눈이 떠졌다. 눈 뜨면 밤하늘의 별과 설산이 거기 있었다. 이마 위에서 글썽이는 그 별들을 두고 과연 누가 그냥 잠들어 버릴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결국 잠들어 버렸다. 꿈까지 꾸었다.

 

꿈에 나는 자기가 별이라고 하는 어떤 소녀를 만났다. 조그맣고 어여쁜 소녀였다. 그런데 소녀는 아름다운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자꾸 가렵다고 했다. 가려우면 긁으라고 했더니 팔이 없어서 못 긁는다고 했다. 보니 정말 팔이 없었다. 어느 섬에서 발견됐다는 그리스 시대의 조각 비너스처럼 두 팔이 다 없었다. 내가 긁어주겠다고 했더니 너무 멀리 있어서 못 긁어 준다고 했다. ‘말도 안 되하며 내가 손을 뻗어보았지만 소녀는 내 손에 닿지 않았다. 아무리 휘저어도 닿지 않았다.

꿈에서 깼을 때는 온몸이 미칠 듯 가려웠다. 보랏빛 새벽하늘 밑에 누워서 여기저기 마구 긁었다. 벼룩이나 이 같은 것들이 내 살을 백군데 이상 깨물고 피를 빨며 독을 묻힌 것 같았다. 밤새 덮고 있던 침구가 갑자기 벼룩 덩어리처럼 느껴진 나는 침구에서 빠져 나왔다. 나와서 보니 옆집 지붕의 소녀들도 잠에서 깨어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여기저기 긁고 있었다. 소녀들은 어깨 뒤며 엉덩이 같은 곳을 긁으며 한 손으로 이불 귀퉁이를 맞잡고 툴툴 털었다. 그리고는 뚤뚤 말아서 옆구리에 끼고 사다리를 타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문득 내 꿈에 나타나 가렵다고 했던 소녀가 생각났다. 꿈에서 소녀는 자기가 별이라고 했었는지 설산 라카포시라고도 했었는지가 헷갈렸다. 나는 별이라고 했는지 라카포시라고 했는지를 잘 생각해 보면서 지붕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지만 라카포시의 봉우리 끝은 벌써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서쪽 하늘에는 작은 별들이 한 줌 쯤 남아 있었다. 그 작은 별들은 나로 하여금 톡톡 튀어 다니는 벼룩들을 연상케 했다. 그 연상은 내 몸 여기저기를 새삼 맹렬한 가려움으로 퍼졌다. 아무리 긁어도, 아니 긁을수록 가려웠다. 긁지 않고 참으려면 이를 악물고, 두 손을 깍지 끼고, 몸을 부르르 떨어야 할 만큼 심하게 가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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