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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성 수필]

우리는 젖은 옷을 벗어 물기를 쥐어짠 후 두 손으로 펼쳐 들고 화끈화끈한 불 앞에 섰다. 그렇게 서서 이글거리는 불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자니 누런 황금빛을 발하는 큰 장독들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것들은 장독이 아니라 황금을 입힌 불상 같았다.

[ 20 ] 옹기의 추억 2  

2019. 11. 25 by 김홍성 시인

 

옹기에 얽힌 추억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은 1972년 초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친구와 나는 경기도 포천 땅의 영평천을 거슬러 국도를 따라 걷던 중에 소나기를 만나 흠뻑 젖은 채 일동면과 이동면 사이의 삼팔교 부근에 이르렀다.

그곳 도로변 야산 기슭에 장독 굽는 큰 가마가 있었다.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을 따라서 아주 길게 터널처럼 만든 가마 입구에서 불땀을 들이던 노인이 우리를 보더니 불도 쬐고 옷을 벗어 말리고 가라고 하셨다. 우리는 젖은 옷을 벗어 물기를 쥐어짠 후 두 손으로 펼쳐 들고 화끈화끈한 불 앞에 섰다. 그렇게 서서 이글거리는 불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자니 누런 황금빛을 발하는 큰 장독들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것들은 장독이 아니라 황금을 입힌 불상 같았다.

노인은 어디서 옥수수 몇 개를 가져다가 가마 아궁이 가까이 던져 놓고서 금방 익는다고 했는데 과연 말 몇 마디 오가는 사이에 옥수수가 익었다. 점심을 굶었던 우리는 노인이 긴 작대기로 끌어낸 옥수수를 얼씨구나 받아서 재를 대충 털고 맛있게 먹었다. 그 때 청계산 하늘에 무지개가 서렸다. 금방 서린 무지개 위에 더 큰 무지개가 서린 쌍무지개였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았다. 서서히 희미해지다가 아주 사라져버렸다.

그 날은 가마에 불 때기를 그치는 날이었지 싶다. 깡마른 체구에 안광이 유난히 빛나는 함경도 노인. 일주일인지 열흘인지 보름인지 잊었으나 가마가 크고 길어서 아주 여러 날 불을 때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몇 번 독을 구워내고 나면 어느새 찬바람 부는 겨울인데, 가마 속은 따뜻하여 집 없는 떠돌이 걸인들이 하나 둘 모여 든다고 했다. 걸인들은 날씨가 추워질수록 가마 깊숙이 기어들며 겨울을 난다고도 했다.

엄청난 화염 속에서 불타기는커녕 오히려 돌 같이 단단해져서 나온 장독들은 얼마나 믿음직한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마당 한구석에 묵묵히 자리 잡은 장독들. 된장독 고추장독 간장독 소금독……. 빈 독은 빈 독대로, 찬 독은 찬 독대로, 조상 대대로 모시고 살만했을 것이다.

해 잘 들고 바람 잘 통하는 앞마당 장독대. 봉선화 채송화 심고 맨드라미 심어서 치장하지 않아도 그곳은 집안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아니 장독 몇 개 놓인 조촐한 살림 자체가 이미 신앙이었다.

그 때의 장독대는 별빛 차가운 새벽에 맑은 물 한 대접 떠놓고 집안에 탈 없기를 비는 곳이었다. 어머니 눈에 가장 오롯한 장독 뚜껑 위에는 그래서 더 많은 별빛이 쏟아졌을 것이다. 거대한 댐이나 고층 아파트가 경제발전의 아이콘이라면 작은 물 항아리나 정갈한 장독대는 조촐한 삶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해 봄 양구 탐방 이후의 우여곡절 끝에 춘천에서 좀 더 살아보기로 하고 찾아낸 저층 아파트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옥상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들 때문이었지 싶다. 이사에 이사를 거듭하면서도 끝끝내 버리지 않은 장독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이웃이라는 건 얼마나 푸근한 일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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