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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내가 지금 구두를 고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걸어온 흔적을 손보는 거지요.” “이 하이힐 주인공은 식탐이 심하지. 남자 잡아먹는 일에 도가 텄는지 늘 애인이 달라.”

[박인 스마트 소설] 구두 한 켤레

2019. 11. 22 by 박인 작가

우리 동네 마을버스 정거장 옆에 반의반 평이나 될까 자그마한 구두수선실에 할아버지가 계셨다. 이름은 모르나 성이 심씨인 그는 흰 수염 주름진 얼굴로 늘 온화하게 웃고 계셨다. 간간이 기침하면서도 온종일 독방 같은 작업실에 앉아 가끔 찾아오는 단골손님을 반겼다. 나는 단골손님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 가끔 들렀다. 족부 의학을 전공한 나는 신발에 관심이 많았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어서 생긴 사람들의 아픈 발을 치료하는 직업의식이 발동해서일까. 낡은 구두 굽을 갈고 광을 내는 그의 손바닥만 한 작업실에는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났다. 이십 년 넘게 독방에 앉아 있으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신발 종류나 걸음걸이를 알 수 있다고 그가 말했다. 걸음걸이를 고치는 게 내 직업이 아니었던가.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함께 구두병원이라도 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좋은 것만을 기억하고 살기로 작정한 다음 날, 그다음 날도 구둣방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박인
▲좋은 것만을 기억하고 살기로 작정한 다음 날, 그다음 날도 구둣방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박인

“내가 지금 구두를 고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걸어온 흔적을 손보는 거지요.”
심 선생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아무리 한국에는 없는 발의학을 공부했다손 치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실업자가 되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사람들이 자신의 발을 돌볼 시간과 여유가 있단 말인가. 나라가 국제통화기금에 시달리던 때인지라, 나는 서울에서 밀려나서 변두리 월세방에 살았다. 우산도 없이 집으로 가던 나는 비도 피할 겸 수선실로 들어갔다. 몇 달간 안 닦던 구두도 닦을 겸. 심 선생님, 그런데 비 오는 날 구두를 닦아도 되나요?

“불광을 내면 방수가 되지요.”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내 낡은 구두를 벗어 놓았다. 나라는 인간을 지고 밟히느라 구두는 깊은 주름이 지고 바닥은 닳고 닳아 투박해져 있었다. 종일 일자리를 찾아 걸어온 내 구두에서 흙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경기가 좋으면 구두가 쌓이고 경기가 나쁘면 길바닥에 낙엽만 굴러다니지. 요즘 구두 코빼기도 보이질 않아.”
입구에 주렴이 내려진 좁은 실내 벽에는 윤이 나는 구두들이 주인의 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낡은 구두가 몇 켤레 쌓여 있다. 구두는 저마다 걸어온 사연이 있어서 각자 다른 모양과 생김새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다. 머무를 직장이 없는 내 낡은 구두를 보며 자존감이 상하기도 했다. 떨쳐 일어나려고 구두라도 닦았다. 신은 구두의 상태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지 않은가.

시간이 나면 막걸리 한 병 사 들고 심 선생 구둣방에 가서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말수가 적은 나는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다. 술 먹고 여자와 바다로 놀러 간 얘기였다.
“제대해서 공장서 일할 때 내게 처녀성 바치러 온 스물한 살 처녀가 있었네. 나 같은 놈하고 자지 말고 네가 사랑하는 남자하고 자라고 내가 좋게 타일렀지. 겨울 바닷바람 부는데 파도는 거세고 막차는 이미 떠났지.”
“그래서요?”
“그래서 그날로 내가 그 처녀의 남편이 되었지 뭐. 우연이 필연이지.”

필연이 우연이고. 기회가 위기이고 위기가 기회인가. 한국에 없는 의학을 전공해서 이리 고생을 한단 말인가. 자문하니 발을 의학적으로 돌보는 일이 언젠가는 필요한데 지금은 시기상조란 말들이 돌아왔다. 넘고 건너야 할 벽과 강이 내 앞에 첩첩산중 놓여 있는 느낌이 들었다. 벽에 맨몸으로 부딪혀 쓰러지고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넘고 건너야 했다. 돌아오기 전 안정된 직업과 병원 일에 자부심을 느꼈었다. 시간을 거슬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온종일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방문 앞에는 어느 거리에서 주인보다 먼저 인기척을 내었던 신발 세 켤레가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아내와 아들과 딸은 잠이 들어있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화두를 가지고 싸웠다. 배가 고플 지경으로 뭔가를 좀 더 많이 버리고 나면, 스스로 성숙한 인간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아직 덜 버렸기 때문인가. 낡은 구두를 신고 끼니 걱정을 하며 단칸방에 살면서 무엇을 더 버리란 말인가.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답답하면 심 선생을 찾아갔다. 그를 찾아가 그렁그렁한 그의 음성을 들으면서 스스로 마음을 치유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날따라 심 선생은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농담을 했다. 바닥에는 굽이 부러지고 구두코가 까진 하이힐이 누워있었다.

“이 하이힐 주인공은 식탐이 심하지. 남자 잡아먹는 일에 도가 텄는지 늘 애인이 달라. 나는 내 마누라가 내 첫사랑인데. 내일 지구가 망한다면 하던 일 멈추고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포옹을 해야지 않겠나.”
“늘 건강하시고요. 건강검진 받아보세요.”
그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내가 말했다.
“너무 들어서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야. 그리고 이것을 받게나.”
심 선생은 내게 검은 비닐봉지를 건넸다. 열어보니 구두 한 켤레가 들어있었다.
“돈 많은 놈이 버리고 간 구두를 새것과 다름없이 내가 고쳤네. 그래도 명품이야.”
“아, 이건 할아버지가 신으셔야…”
내가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 서 있자 그가 말했다.
“내가 폐암 말기야. 세상이 변하려면 빨리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는 게 좋은 거지. 자네도 늘 좋은 것만 기억하게.”

좋은 것만을 기억하고 살기로 작정한 다음 날, 그다음 날도 구둣방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들고 갔던 막걸리는 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심 선생이 준 명품구두 대신 나는 여전히 내 발에 익숙한 낡은 구두를 끌고 다녔다. <끝>

스마트 소설은 짧은 시간에 대중 영상 매체인 스마트폰으로 읽는 소설입니다. 눈으로 빠르게 읽고 머리와 가슴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박인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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