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학 레이크밸리승마클럽 대표는 ‘나를 변화시킨 승마장’ 수기 공모전에서 ‘내가 말을 사랑할 수 있을까?’를 주제로 글을 써 장려상을 수상했다.
현 승마산업을 요약하자면, 말 그대로 ‘좌충우돌’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설왕설래’ 하는 대신 시행착오를 겪었던 누군가의 경험과 노하우를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알린다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본지 은 승마산업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지면을 할애해 ‘2015 승마산업 컨설팅 워크숍 수기 공모전, 나를 변화시킨 승마장’ 당선작 총 6편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당선작 최우수상에는 윤화영 소노펠리체승마클럽 교관의 ‘허리 아픈 여고생의 재활승마코치 변신기’, 우수상에는 이소영 시흥승마힐링센터 과장의 ‘고고야 같이 가자’, 정명수 함양승마클럽 대표의 ‘자연과 함께 청소년들의 꿈을 심는 승마’, 장려상에는 이상학 레이크밸리승마클럽 대표의 ‘내가 말을 사랑할 수 있을까’, 권은출 말보르승마장 대표의 ‘승마장은 아무나 하나’, 김경학 피터팬승마캠프 대표의 ‘처음 승마장에 꿈을 꾸었던 계기’가 선정됐습니다.

첫 시작으로 이상학 레이크밸리승마클럽 대표의 ‘내가 말을 사랑할 수 있을까’를 소개합니다. 본 수기는 한국마사회 말산업육성본부 승마진흥원(원장 안계명)이 주최한 ‘2015 승마산업 컨설팅 워크숍 수기 공모전’ 당선작으로 사업 홍보 목적 활용에 동의한 내용입니다. - 기자 말.


“돈을 받고 말을 태울 수가 없어 부끄러웠다…수익 창출은 되지 못하고 시행착오로 2006년이 또 지나갔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 밖에 없었다…말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승마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한 실패작이라는 것을 얼마 되지 않아 알았다.”

“‘어떻게 말을 사랑하고 키울 수 있을까?’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말부터 알아야 했다…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자라준 말들이 고마워졌다. 그래, 이젠 나도 너희들을 사랑한다.”


대기업에서 보낸 2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또 다른 세계로 나왔을 때, 나는 우물 안 개구리 보다 더 작았다. 온실 안에서 고이 자란 한송이 잡초인 듯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답답함과 무력감에서 지금의 승마장 터에서 텐트를 치고 모닥불 피워 놓고 추웠던 2004년 2월을 보냈다.

승마장…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한 번도 가까이 해본 적이 없는 말을 사랑할 수 있을까?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풀 한 포기 베어 보지 못한 문과 서생이 견뎌낼 수 있을까?

2004년 3월 30일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포크레인 2대와 덤프트럭 2대가 아직 햇살이 들지 않은 승마장 터에 들어오니 ‘아!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뒤로 갈 곳은 없었다. 땅은 몸살을 앓듯 파헤쳐져서 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100여 일. 승마장 터가 어렴풋이 모양을 갖춰 갔다. 장마가 시작돼 공사는 중단되고 하염없이 5,000여 평의 대지를 바라보면서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수만 수천의 그림을 그리고 지우기를 해도 답이 없었다.

‘그래, 모든 것을 중단하자! 답을 찾을 때까지….’ 배낭을 꾸려 차에 싣고 승마장 리스트 40개를 쥐고 그해 7월 4일 맨 위에 있는 승마장부터 제주까지 43일을 소위 벤치마킹을 했다. 답을 찾을 줄로 알았는데… 오히려 주눅만 들고 가슴만 더 답답하고 그 누구도 승마장 사람은 만나기 싫어졌다. 9월 한가위가 지나고 모두들 포기하라고 했지만 ‘내가 문제를 내고 내가 답을 찾자!’고 생각했다. 포기! 살아온 50년 동안 나는 포기라는 단어를 기억도 담지도 않았는데….

다시 공사를 시작했다. 겨울이 오기 까지는 거처할 사무실이라고 완공하기로 마음먹고 교량공사부터 시작했다. 다리를 놓는다는 것이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그냥 다리가 아니었다. 설계에서부터 공사까지 꽤 까다로운 난관이 많은 공사였다. 갈수기인 11월에 시작했는데도 이른바 방석을 앉히고 기둥을 세워서 굳기까지 3일간을 밤을 새워 물을 양수기로 퍼내기도 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온 듯 했다. 끝까지 승마장 허가서를 내 손으로 받아 올 때 까지 끝장을 보기로 했다. 그해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다.

2005년 봄은 어김없이 왔고, 지난 1년간 승마장 터는 어느 정도 가라앉아 굳은 듯 했다. 다시 포크레인과 불도저를 불러 수평을 잡고 운동장에 석분을 받기 시작했다. 수평을 맞추려니 석분이 끊임없이 들어갔다. 퍼 나르고 날라도 끝이 보지지 않기를 20여 일, 어느 정도 수평을 잡고 보니 15톤 덤프트럭으로 700차가 넘어갔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 밖에 없었다. 운동장이 석분으로 하얗게 보이고 축구장을 4개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여기다 무엇을 할지 찾아야 했다. 공사비는 최저로 들이고 승마인들이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은 최대로 하기로 했다. 벤치마킹을 하면서 투자가 많을수록 수익은 악화되고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규모 확대가 불가피한 것이 보였다. 투자는 적게 하고 수익은 적정선에서 유지하는 운영 이외에는 해답이 없이 보였다.

승마가 고급 스포츠로서 고가의 기승비로는 많은 회원을 확보할 수 없고, 소수의 회원으로는 유지가 어렵다고 봤다. 승마의 대중화를 목표로 가격은 낮추고 다수의 회원제를 선택하기로 정했다. 사무실도 적은 금액으로 필요한 시설만 만들되 말이 들어갈 마방만큼은 벽돌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고 외벽은 집에 버려져 있는 자재를 활용해 비용을 최대로 줄여서 지었다.

마장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 돼 과천경마장을 찾았다. ‘저렇게 크게 하면 달리는 승마인들이 좋아하겠지….’ 마장 외부만 나무 펜스로 하고 트랙은 플라스틱 안전판으로 둘러 400M 트랙을 만들었다. 말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승마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한 실패작이라는 것을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되었을 때 어이가 없었다. 모든 시설이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출 때 기회가 찾아왔다. 국민생활체육 전국승마연합회 정성규 국장님이 승마장을 찾아 주셔서 제6회 문화관광부장관기 국민생활체육 전국승마대회를 레이크밸리 승마클럽에서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대회도 한번 본 적이 없고 운영도 해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문외한이요, 초보도 입문하지 않은 내가 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대회를 유치하기로 했다. 그것도 1박 2일로….

대회는 성공적으로 무사히 잘 끝났고 많은 손님들이 승마장에 오셔서 시설과 입지를 둘러보고 칭찬과 격려를 해줬다. ‘아! 승마가, 승마장이 이런 것이구나!’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아직 내 스스로 승마를 하고 말을 키울 수가 없음을 알게 된 대회이기도 했다.

2005년 12월이면 체육시설로 등록허가증이 나올 것으로 예상돼 말을 구입하기로 했다. 그 전에 교관도 1명 채용했다. 2006년 1월 12일 드디어 허가증이 교부됐다. 만감이 교차하고 계획보다 많은 금액이 들어가 놀래기도 했지만 날아갈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도 잠시, ‘어떻게 말을 사랑하고 키울 수 있을까?’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2006년 1년은 자마와 영업 말 5마리로 시범운영하기로 결심을 했다. 말을 그것도 한 번도 타보지도 키워 보지도 않은 내가 말을 5마리를 샀다. 말이 말차에서 내릴 때 겁이 나서 말을 끌어 내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정이 안 갔다.

‘어떻게 말을 사랑할 수 있을까?’ 말부터 알아야 했다. 수의사를 알아보고 1년 계약을 했다. 1달에 1번 승마장을 방문해 일괄 점검 치료하고 리포트를 보내주기로 했다. 한 번 오면 물어 보고 또 물어 보고 관리 방법과 치료 방법 등을 귀찮도록 물어봤고 리포트를 몇 번이고 읽어 암기했다. 돈을 받고 말을 태울 수가 없어 부끄러웠다. 내가 자신 있을 때까지 자마비만 받고 운영하고 영업 말은 무료 기승으로 시범운영하기로 했다. 다행이 자마가 11마리가 마장에 들어와서 운영은 크게 어렵지 않았으나, 수익 창출은 되지 못하고 많은 배움과 시행착오로 2006년이 또 지나갔다.

2007년 처음으로 사업 계획서를 작성했다. 목표를 세우고 회원 유치와 운영 계획을 세웠다. 인터넷에 홍보비를 내고 홍보도 하고 신문에 잡지에 많은 노력을 했다. 회원들이 늘기 시작하니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자마가 어느새 21마리가 되고 영업 말이 15마리로 늘었다. 교관과 관리사가 문제였다. 내국인을 채용하러 의정부고용센타를 방문해 부스를 설치하고 구인도 했으나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승마장이 외국인 고용이 안 되는 업종인지도 모르고 몽고인 3명을 고용하기도 했다가 단속되기도 했다.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면서 2007년이 지나갈 쯤 예상된 사건이 발생했다. 사소한 문제로 자마 회원 간에 경찰이 출동하는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깊은 고민에 빠졌고 방향 전환이 필요했다. 자마를 최소화하고 본래 영업 목표인 저렴하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퍼블릭 승마장으로 변신이 불가피했다. 자마회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승마장은 텅 빈 듯했다. 2년간 운영했던 모든 것이 사라진 듯 허탈했고 수입은 갑자기 50% 이상 줄었다.

이제 다시 시작하는 2008년이 됐다. 다시는 자마에 의존하지 않고 내 손으로 내 회원을 만들어 운영하기로 결심했다. 자마가 모두 떠나고 내 소유 말들만 넓은 승마장에 남았다. 그동안 자마에 치어 제대로 눈길도 못 준 불쌍한 놈들…. ‘이제 너희들과 이 승마장을 운영해서 사랑받는 승마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자라준 말들이 고마워졌다. ‘그래, 이젠 나도 니들을 사랑한다.’ 새로운 교관을 충원하고 2008년 겨울을 말 훈련에 전념하여 어린이들도 탈 수 있게 순치하고 봄을 준비했다. 남은 터에 4륜바이크장도 만들고 국궁장 족구장을 만들어 레포츠 회사와 제휴영업을 하기로 했다. 이벤트 회사도 초청하고 학교에도 안내문을 보내 단체 유치에 공을 들인 결과 자마가 있을 때보다 수익은 좋았다. 그러나 이것은 승마장이 아니라 체험 승마만 하는 것처럼 주말이나 휴일은 정신없이 자나갔고 회원들은 피로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음을 양해 구하고 2년 안에 꼭 회원 중심의 승마장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회원을 늘이기 시작하면서 이벤트나 단체 체험 승마를 축소하기를 2년! 어느덧 회원이 100명을 넘고 100회 이상 기승한 회원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초로 말을 구입해 17마리가 되기까지 1마리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10년을 넘게 함께 해준 내 사랑하는 말들…. 하루라도 안보면 궁금하고 혹여 다치기라도 하면 내 몸처럼 아린 사랑하는 말들….

2010년 기승비를 인상하고 회원 중심의 영업으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회원의 반발로 이탈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예상됐지만, 장문의 글을 대자보로 붙이고 기승비 인상의 불가피함을 설명하고 설득했고 젊은 20~30대가 너무 마음에 걸렸지만 모든 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수익도 확보되고 회원의 만족도를 높이는 세세한 부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자 승마장은 안정적으로 운영됐다.

마음의 여유도 생기도 직원들도 안정돼 2013년까지 재미있고 여유 있게 승마장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4년 세월호 사건으로 2015년 메르스 사태로 조금은 주춤하나 변함없는 회원들의 사랑과 내 사랑 하는 말들이 건강하게 승마장을 지켜주고 있다.

10년을 함께 해준 말들…. 이제 10년을 더 함께 할 자신이 있다. 이젠 나도 말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한국마사회 말산업육성본부 승마진흥원이 11월 2일 주최한 ‘2015 승마산업 컨설팅 워크숍’ 장면. 이날 행사는 승마진흥원 승마기획팀의 철저한 기획과 준비, ㈜창작프로젝트 또다른(대표 최혜영)의 말끔한 진행으로 참가자 모두에게 감동의 무대를 선사했다.
▲이상학 레이크밸리승마클럽 대표는 ‘나를 변화시킨 승마장’ 수기 공모전에서 ‘내가 말을 사랑할 수 있을까?’를 주제로 글을 써 장려상을 수상했다. 이날 워크숍에서는 이 글을 주제로 한 영상을 선보였다.
▲안계명 승마진흥원장(좌쪽에서 두 번째)과 수기 공모전 장려상을 수상한 이상학 레이크밸리승마클럽 대표(맨 우측), 권은출 말보르승마장 대표(우측에서 두 번째), 김경학 피터팬승마캠프 대표(맨 좌측)가 수상식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글=이상학 레이크밸리승마클럽 대표
원고 및 사진 제공=한국마사회 말산업육성본부 승마진흥원
교정·교열=이용준 기자


작 성 자 : 이용준 cromlee21@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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