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식 감독의 DEAR MY CLASSIC GIRL(4)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 어떤 일이든 모르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물어 배워야 한다.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어떻게 잘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외승Ⅱ

생명력이 넘치는 밤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조금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오는데,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 말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1985년 여름, 나는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당시 아시안 게임 대비를 위해 국가대표 자격으로 훈련에 참가했다. 이곳을 지나면 그때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산초 향의 추억
이곳 가파른 언덕을 올라갈 때면 말들은 속보를 하고 싶어 한다. 속보를 하지 못하게 해 평보로 올라가면 짧은 언덕이지만 꽤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오르막이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는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다. 내리막은 오르막보다는 경사가 완만하다. 내리막 경사 중간에 내리막을 완만하게 해주는 조금은 평평한 곳을 지나는데 오른편으로 제법 큰 산초나무가 자라고 있다. 나는 산초의 향기를 좋아한다. 특히 어릴 적에 외갓집 할머니께서 산초를 짜서 만든 산초 기름으로 김치 비빔밥을 해주셨던 추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초등학교 진학 전이라고 기억된다. 당시 산초로 짠 기름은 내게는 너무 향이 진한 맛이었다. 맛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모호한데, 그때 맡았던 산초의 향은 잊혀지지 않는다. 가을에 이곳을 지나면 산초 기름을 정성 들여 짜시던 천국에 계신 외할머니가 생각나곤 한다.



산초나무를 지나면 평화로운 정적을 깨우는 길이 나타난다. 이제부터는 각별히 조심을 해야 한다. 이 길 바로 밑으로 주암 마사동이 있어 소란스럽기 때문이다. 주암 마사동에는 훈련을 마친 말들의 수장하는 소리, 새 신발로 갈아 신기 위해 탕! 탕! 탕! 망치 두드리는 소리, 좁은 방목장에서 밤새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말들의 몸부림, 훈련을 마치고 가쁜 숨을 달래려고 한 줄로 줄을 맞추어 마무리 운동을 하는 무리, 훈련하러 가려고 신이 나서 총총걸음을 하며 빨리 가자고 보채는 녀석들까지 갖가지 군상들이 펼쳐진다. 이런 바쁜 움직임으로 인해 평보로 이곳을 지나가던 녀석들도 마음이 들뜬 듯이 총총거리는 속보하기 십상이다.

이제 외승 길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말들도 이때쯤 되면 집이 가까워졌다고 느끼며 이내 빠르고 급한 걸음으로 재촉한다

측대보(Pacing)

뭐가 그리 급하냐?
마장마술로 전향하고 얼마 동안은 훈련에 대한 의욕이 넘쳤다.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부리는 욕심은 고스란히 CG(Classic Girl, 이하 CG)의 몫이었다. CG는 나의 넘쳐나는 훈련 욕심을 받아주느라 무진 고생을 했다. 당시 나는 오로지 훈련에 대한 생각만으로 급급했다. 빨리 훈련시켜 대회에 참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여유롭지 못한 훈련 계획을 세우고, CG에게 무리한 요구만을 했다.

CG의 급한 성격은 나의 조급한 훈련 방식 때문인지 아니면 CG의 성격이 원래 급해서인지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그랑프리를 할 줄 아는 지금도 CG의 급한 성격은 조금씩 불협화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매일매일 조급하게 훈련을 하던 어느 날,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나의 조급함에 대해 돌이켜보는 기회를 갖게 됐다. 평소처럼 훈련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던 감독님이 “재식아! 좀 천천히 해라! 뭐가 그리 급하냐?”고 말씀하셨다. 그 소리를 듣고 난 후 나는 잃어버린 지갑을 되찾은 것 같은 반가움과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그동안 급하게 훈련해 왔다는 걸 알아차렸고, 내 훈련 방식을 돌이켜보는 계기가 됐다


여유로움 찾기 위해 시작한 외승
나는 다음날부터는 생각하며 여유롭게 훈련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훈련에 앞서 외승로를 한 바퀴 평보로 돌고 오기로 계획을 세웠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을 때는 훈련을 마치고 외승을 다녀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훈련 전에 다녀왔다. 수개월 가량 계속해 훈련 전 또는 후로 외승을 해줬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좀처럼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항상 좋게만 생각했던 외승의 효과가 CG에게는 최대의 약점으로 나타나게 될 줄이야.

아마도 나는 마장마술에 입문하면서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듯싶다. 마장마술을 시작하면서 훈련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각 보법의 정확성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30년 이상 말을 타오던 나는 마장마술을 얕잡아보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 장애물 마필의 경우는 보법이 어떻든 장애물만 잘 넘으면 되었기에 보법의 특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나의 보법에 관한 무관심은 마장마술로 전향하고도 한동안 지속됐다.

CG와 수개월 동안 매일매일 외승을 하면서 의아했던 점은 CG가 왜 급한 마음을 갖는지 오직 한 가지였다. 하루도 변함없이 급하게 걷는 CG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매일 평보를 하면 차분해 질만도 한데 한 치의 변화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항상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외승하는 내내 CG를 여유롭게 누그러트리는 생각만 했다. ‘왜 천천히 걸어가지 않을까?’ 고민은 했지만 당시에는 보법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단순히 고삐를 당기거나 보조 고삐인 Draw-rain을 짧게 잡았던 게 고작이었다. 그 외에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니 몰랐었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린다.

이 당시 평보로 외승할 때 나의 골반으로 전해지는 느낌은 골반이 밀린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속보는 분명 아닌 듯하고 평보인 것은 확실하나, 골반이 앞뒤로 밀리는 중간에 내 체중으로 인한 추진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좋은 평보는 앞뒤로 충분히 골반을 밀어줘야 한다. 그런데 CG의 평보는 골반을 앞으로 끝까지 밀리는 마지막 부분이 생략됐고, 뒷부분에서도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끝부분에 와서 힘없이 추진이 사라지고 골반을 끝까지 밀어주지 못했다. 이러한 CG의 평보에 의아해하긴 했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나는 마장마술에 대해 무지했다.

첫 대회 참가. 초라한 성적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우리는 드디어 첫 번째 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처녀 출전한 종목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얻은 성적은 너무나 초라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 나는 심판지를 받았고 각 심판이 써놓은 Remark를 훑어봤다. 그 가운데 평보 부분에 눈길이 멈췄다. 그곳에는 ‘Pacing’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당시 마장마술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 없었던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창피함과 답답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알아야 다음 대회에서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심판 용지를 들고 심판을 봤던 후배에게 다가갔다. ‘Pacing이 뭐니’라고 물었더니, 후배는 “오빠, 마장마술 선수가 Pacing도 몰라?”라고 웃으며 핀잔을 줬다. 그 후배는 내게 ‘Pacing’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마장마술 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마장마술을 하겠다고 덤빈 나는 가장 기초이고 기본이 되는 평보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용감하게(?) 마장마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나는 지루한 평보를 장시간 할 수 있고, 아름다운 외승길을 배경 삼아 걷는 외승이 여러모로 득이 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의도치 않게 수개월에 걸쳐 잘못된 자연 조교를 열심히 시키고 만 것이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 했다. ‘실수 아닌 실수’로 인해 평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됐고, 열심히 하는 것보다 어떻게 열심히 할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Pacing을 알고 난 이후부터 이를 고치는데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바닥에 평보로 지나갈 수 있는 간격으로 횡목을 깔아놓고 운동 전후에 지나다니기를 지속해서 반복했다. 이후에는 고삐 연결을 부드럽게 해 자유 평보가 아닌 온 더 비트(On the bit; 말 입에 연결된 고삐를 잡았을 때 말의 콧등이 수직선 상에 오도록 말이 양보한 모양) 상태로 한발 한발 아주 천천히 평보를 시켰다. 이때에도 CG는 아주 약한 강도이지만 재갈 반항을 하거나 물고 있는 재갈을 의지한 채로 Pacing의 사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급해지면 바로 Pacing현상이 나타나곤 했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됐다. 가끔 CG의 심리 상태가 최고로 안정돼 있다고 느껴지면 짧게 잡고 있던 고삐를 조금 늦춰줘 리듬이 흩트려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중간 평보나 신장 평보를 시켰다. 그 결과 조금씩 좋아지고는 있으나, 아직까지 평보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진다. 또한 경기에 출전해서도 평보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고치기 위한 훈련은 지속할 것이다. 아마도 완벽하게 고쳐지지는 않을 것 같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대한 만큼의 성적은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알고 난 이후부터는 사계절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외승 길을 CG과 함께하는 것을 지금까지도 자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승용마사 뒤편으로 나있는 길은 여전히 애용하고 있다. 나의 욕심만 채우려고 훈련으로 쌓인 CG의 스트레스를 풀어주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평보는 전과 다르게 한발 한발 느껴가면서 앞으로 또 앞으로 내딛고 있다.


측대보(Pacing) - 같은 쪽의 앞·뒷다리를 동시에 드는 걸음걸이.

▲가파른 언덕을 올라갈 때면 말들은 속보를 하고 싶어 한다. 속보를 하지 못하게 해 평보로 올라가면 짧은 언덕이지만 꽤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오르막이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는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 어떤 일이든 모르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물어 배워야 한다.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어떻게 잘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


작 성 자 : 황인성 gomtiger@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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