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식의 ‘나와 함께한 녀석들’(1)

지난해 6월부터 반년에 걸쳐 전재식 감독과 신데렐라마 ‘클래식걸’과의 일화를 담은 ‘Dear My Classic Girl’을 본지를 통해 연재했다. 이미 승마팬들 사이에서 왕자님과 신데렐라마로 잘 알려진 전재식 감독과 클래식걸의 이야기는 많은 승마팬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이번 회부터는 전재식 감독이 어린 시절 승마를 시작할 때부터 현재까지 동거동락했던 말들을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승마인에게 ‘말’은 승마 운동을 위한 단순한 동물매개체가 아니다. 친구이자 동료, 때로는 치유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승마선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대동물인 말에게 기대거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힐링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한다. 그만큼 말은 치유 능력도 갖고 있는 셈이다.

전 감독과 함께 했던 말들과의 일화를 통해 많은 승마인과 승마팬들이 자신과 함께 호흡하는 말들에게 애정을 갖고 소중함을 느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기자 말-

올림픽 꿈나무로 시작한 승마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시청 앞에 위치하고 있는 금곡중학교이다. 1980년 초 우리나라는 서울에서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올림픽 유치 위원회를 구성하고 올림픽 개최를 이끌어내는 데 힘썼다. 이때 올림픽 개최와 함께 올림픽이 열리는 종목별로 꿈나무를 선발해 육성시키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난 당시 선발된 올림픽 꿈나무 중에 하나로 승마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 시골 학교에서 승마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비용도 많이 들고 접하기가 어려웠던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백형진 경기도 승마협회 회장님께서 순수 자비를 들여 승마 꿈나무 양성을 시작하신 덕분에 난 그 어려운 시절에 승마를 시작할 수 있었다.

승마의 ‘승’자도 모르던 시절
운동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는데도 학교 친구들은 말은 타 보았느냐고도 묻곤 했다. 그때마다 그럼 승마선수가 말을 타지 않으면 뭐하겠느냐고 대답하면 친구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승마를 시작한 지 1년이 넘던 어느 날 말을 타고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서 신나게 말을 타고 뛰는 내 모습을 보고 반신반의하던 친구 녀석들의 놀란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승마장이 있던 진건면에서 학교까지의 도로에는 일부 콘크리트로 포장되어있고 일부는 비포장이었으며 차량의 통행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사릉과 금곡을 오가는 시내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정도 있었으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승마가 우리에게 얼마나 먼 이야기였는지는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말을 어려워하지 않는 비법
나는 어려서부터 밖으로 나가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놀기를 무척 좋아했다. 아마도 이러한 내 성향 덕분에 책상에만 가만히 않아 있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성향은 말을 타는 데 큰 도움을 줬던 것 같고, 승마를 시작하면서 더욱 발전되어 간 듯하다.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자연스럽게 놀고 만지고 보고 느꼈던 경험은 대동물인 말을 어려워하지 않게 했고, 처음부터 친근감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물론 전혀 두려움이 없던 것 아니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이내 친근감에 묻혔다.

인생의 첫 말 ‘서해성’이 선물한 화려한 신고식
내가 처음 기승한 말은 ‘서해성’이란 이름의 말이었다. 조랑말처럼 체구가 아주 작은 말이었지만 체형은 조랑말이 아니었다. 당시 뚝섬 승마훈련원에서 초보 강습을 받았다. 초보 강습 첫날은 보조 교관(당시 마필관리원)에 의해 조마삭으로 기승을 시작했다. 말에 올라타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전에 말이 뒷발질을 세차게 해 앞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낙마를 하고 만 것이다. 체형이 작은 말이라서 그랬는지 무섭기보다 재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마 후 얼른 다시 일어나서 옷을 털지도 않고 다시 기승했던 기억이 난다. 만약 ‘서해성’이 작은 말이 아닌 큰 말이었다면 아마도 낙마 후에 다시 올라타기를 주저했을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처음 기승하는 사람이나 초보자들은 큰말보다는 상대적으로 작은 체고를 가진 말을 타면 조금 더 자신감 있게 승마를 배울 수 있단 생각이다. 첫 기승에서 낙마라니 신고식 한번 제대로 치른 셈이다. 그 후에 일주일간 뚝섬 승마훈련원에서 승마선수로서의 첫발을 힘차게 내디뎠다. 당시 같이 강습을 받았었던 동기 중에 가수 현숙 씨도 있었다.


‘유신’ - 첫 대회 출전을 함께 출전하다
말과 생활한 지 7~8개월이 지나갈 무렵 우리의 우상이자 존경하는 백갑수 교관님께서는 우리를 대회에 참가시키기 위해 고된 훈련을 시켰다. 당시 대회는 뚝섬에 있던 한국마사회 승마훈련원에서 열렸는데 ‘유신’이란 녀석은 나와 함께 처음 대회에 참가하려 한 말이었기 때문에 대회를 준비하는 내게는 어느 말보다 특별한 말이었다.

특이한 이력을 가진 말
그러나 녀석은 장애 아닌 장애가 있던 말이었다. 지금은 승마 전문 마필을 외국에서 수입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승마 전문 마필로 외국에서 수입되어온 마필은 찾아보기가 무척 힘들었다. 대부분의 승마용 마필은 경주퇴역마나 경주 부적합 판정을 받은 마필이었다. 승마대회에 출전하는 마필들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경마장에서 퇴출당한 마필을 재순치하고 장애물 교육을 시켜 대회에 출전했었던 시기였다. 녀석도 이런 마필 중 하나였다. 하지만 여타 다른 마필에 비해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마필생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경주 마필은 미국이나 호주에서 수입됐다. 어린 마필을 구매하러 외국에 갔던 구매자들은 수십 마리에서 백여 두 가까이 되는 마필을 수입하기 위해 하나하나의 개체를 살펴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커다란 방목장에 방목된 말의 무리를 보고 마필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 무리 중 어떤 말은 능력이 우수한 말도 있을 것이고, 어떤 말은 경마를 뛸 수 있는 상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마필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유신’ 이 녀석은 경마 마필로는 최악의 마필이었을 것이다. 경마 마필로 불합격 판정을 받은 녀석은 사유가 심각해 당시 마장동에 있던 말 도축장까지 갔었다고 한다. 보통은 경마장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으면 승마장에서 구입해 용도에 맞춰 재사용하지만 녀석의 문제는 매우 심각했던 모양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녀석은 마장동까지 갔었지만 녀석의 운명은 다하지 않았었나 보다. 어떤 사람이 외모가 멀쩡한 녀석을 보고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아주 싼 가격에 기초 승용마용으로 쓰려고 녀석을 구매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경기도 승마협회에서 이 녀석을 구입하게 됐다. 그렇게 녀석은 나와의 인연을 맺게 됐다.

-다음 호에 계속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

▲시골 학교에서 승마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던 시절. 난 당시 올림픽 꿈나무로 선정돼 승마를 시작하게 됐다.
▲어려서부터 밖으로 나가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놀기 좋아하던 성향은 말을 타는 데 큰 도움을 줬던 것 같다. 승마를 시작하면서 그 능력은 더욱 발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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