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식 감독의 ‘나와 함께한 녀석들’(4)

사나운 수말 세 마리의 등장
학교 오전 수업을 마치고 승마장에 가보니 새로운 말 세 마리가 새로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모두 거세하지 않은 수말이었다. 세 마리 모두 하나같이 사나워 보여 마방 안에 들어가는 것마저도 두려웠다. 그들은 잠시라도 자기들 마방 앞에 다른 말들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튀어나와서 해코지할 듯한 기세였다. 보였다. 어딘가에서 말 발자국 소리라도 들려 올라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합창 소리를 내기가 일쑤였다. 이러다 보니 마방 안은 늘 싸늘한 정적만이 흐르고 기승을 할라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예삿일이었다.

‘흑곰’의 마상착의(?)
사납게만 보이던 그놈들은 교관님 손에 의해 점차 온순해져 갔다. 게다가 장애물도 아주 수준급으로 하게 됐다. 그놈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흑곰’이었다. 녀석을 잠시 설명하자면 걸음걸이가 가볍고 무릎을 드는 높이가 높았지만,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다. 전진 기세가 부족한 듯해 보였다. 뒷다리의 움직임은 수놈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활발하진 않았다. 외형은 머리 정수리 부분에 흰점이 있어 귀엽고 깨끗한 인상을 풍겼다. 몸 전체가 푸른색이 감도는 검정에 이마에만 야구공만 한 크기의 흰점이 있으니 눈에 확 띄는 좋은 말상이었다. 왼쪽 목 중간부근에는 오백 원짜리 동전만 한 사마귀 같은 피부암을 가지고 있었으며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말을 타고 대회장까지
이놈은 장애물을 곧잘 했다. 난 이놈을 타고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리는 이용문장군배 승마대회에 출전한 적이 있었다. 대회 출전을 위해 우리 둘은 승마장에서 육군사관학교까지 약 20km가량을 말을 타고 이동했다. 각종 장구와 사료 등은 교관님 차에 싣고 옮겼다. 당시에 마필 수송 차량은 많은 돈을 내고 빌리기도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거리가 가까운 곳에서 대회가 열린 때에는 대부분 말을 직접 타고 이동했다. 어렵게 마필을 이동하고 대회에 참가했지만, 난 장애물 경기 중에 비월한 후 착지하는 순간 몸이 늦게 따라가 엉덩이가 안장 끝에 앉게 됐고, 그때 잘못돼 꼬리뼈 연골이 부러져 안으로 밀렸거나 옆으로 틀어져 버렸다. 당시에 대회가 끝난 후에 한참 동안 대변보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근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오랜 시간 앉아있으면 여전히 통증이 있다. 이처럼 이놈은 나와 특별한 인연을 가진 듯하다.

마필 수송 특급 작전
한번은 뚝섬 한국마사회 승마훈련원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말들을 수송 차량에 싣고 수송하게 됐다. 수송 차량이라고는 하지만 당시는 이삿짐 화물을 빌려서 수송을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더구나 이삿짐 화물차는 지붕이 없었다. 말을 태우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말을 실기 위해서는 화물칸 높이의 작은 언덕이 필요했다. 언덕 위로 말을 끌고 가 화물차에 싣고, 칸막이는 장애물 횡목을 길이에 맞게 잘라 칸을 막고 화물차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고무바(고무로 만든 두꺼운 끈)로 횡목을 단단히 묶어야만 했다. 단단히 묶는 일도 다년간 경험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당시 사나운 수놈 세 녀석은 차량 맨 앞쪽에 태웠다. 그리고 다른 말들과 싸우지 못하게 칸막이로 만든 횡목 위에 우리가 앉아 그놈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우리는 때론 녀석들을 위협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극도로 긴장된 상황을 극복해나가며 수송을 하곤 했다. 당시에 말을 구경하는 게 흔치 않은 일이라서 그런지 교통경찰들도 우리들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봤고,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 마필 수송은 백마구락부에서 출발해 광장동을 지나 뚝섬 한국마사회 승마훈련원으로 향했다.

수송 차량에서 떨어진 말
사고가 있던 날은 광장동 사거리에서 빨간 정지 신호에 마필 수송 차량이 멈춘 상태였다. 잠시 긴장을 푸는 순간 맨 앞쪽에 탄 녀석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녀석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녀석의 난동은 이미 도를 넘어선 듯했다. 그 순간 앞다리를 들어 올려 앞쪽 가림막 칸막이 위에 두 발을 올림과 동시에 단단히 묶여있는 마방 굴레 끈을 힘으로 끊어버리려고 했다. 뒷다리 쪽으로 체중을 옮기더니 결국 뛰어올랐고 텀블링하듯 녀석의 몸이 뒤집어지며 수송 차량 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차량이 정지된 상태에서 떨어졌고, 마방 굴레 끈이 튼튼해 끊어지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많이 다치지 않았다. 또한, 당시는 지금처럼 도로에 차량이 많지 않았던 것도 많이 다치지 않는 데 한몫했다. 만약 마방굴레 끈이 끊어졌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고생보다는 순간을 즐기다
앞서도 말했듯이 당시에는 전문 마필 수송 차량이 없었다. 그래서 말이 수송 차량에서 떨어지는 사고 후에 다시 실기는 사실상 힘들었다. 화물차 높이의 작은 언덕이 없다면 절대로 말을 차에 태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고민하시던 교관님께서는 할 수없이 나와 함께 운동하던 친구에게 양쪽에서 말을 끌고 광장동 사거리에서 뚝섬 한국마사회 승마훈련원까지 끌라고 하셨다. 당시 우리는 교관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랐고, 우리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당시는 그게 대단한 일인 줄도 몰랐다. 우리는 도로 위에서 말을 끌기 시작했다. 우리 뒤로 교관님께서 비상등을 켜고 따라오셨기 때문에 불안감도 없었고, 힘들단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심지어 행인들이 우리를 구경하는 것을 보며 그 순간을 즐겼다. 가끔 어린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너무 가까이 다가서려는 통에 소리를 지르며 위험에서 벗어나는 순간도 종종 있었다. 그런 상황 상황들이 우리를 고됨에서 탈출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교관님은 내게 존경 그 이상의 존재셨다. 지금도 교관님은 경외의 대상이지만 이런 어려운 일들을 모두 이겨냈던 건 교관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존경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은 전문 마필 수송 차량이 있지만, 당시 수송 차량은 이삿짐 화물을 빌려서 수송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82년 뚝섬승마장에서 ‘흑곰’과 함께.
▲어린 시절 교관님은 존경 그 이상의 존재셨다. 어려운 일들을 모두 이겨낼 수 있던 건 교관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존경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1991년 육군사관학교 초청연 당시(가운데 전재식 감독, 맨 우측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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