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식 감독의 ‘나와 함께한 녀석들’(8)

신비한 모색을 가진 ‘사슴’
‘사슴’을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좋은 말일 거라고 생각을 했다. 수놈이긴 했으나 다른 말을 보고 유별난 행동을 하지 않았고, 필로미노(palomino) 모색을 처음 본 우리에게는 신기하고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게 했다. 그런데 교관님의 반응은 우리와 너무 달랐다. 교관님은 이놈이 도착하고 나서 마방 안에 넣어 두고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셨다. 이놈이 도착한 다음 날, 교관님의 진두지휘 아래 조심스럽게 녀석의 등에 안장을 올리고 교관님께서 직접 이놈을 기승했다. 교관님은 사료를 한 주먹 들고는 ‘사슴’ 녀석에게 먹이며 마방굴레를 착용시켰다. 우리는 별생각 없이 ‘좋은 말이라서 정성을 들이시는구나’란 생각을 할 뿐이었다.

반전의 그놈 ‘사슴’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사슴’ 녀석같이 막돼먹은 놈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다. 교관님이 녀석의 등에 오르자마자 로데오를 하는 마냥 교관님을 떨어뜨리려는 모습을 보였다. 예사로 지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작심하고 지랄을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사슴’ 녀석 우리 교관님을 너무 잘 못 봤다. 그놈은 잠시 후 후회막급한 일을 당하고 만다. 교관님은 버릇없는 놈들한테는 절대로 친절한 분이 아니셨다.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포기 않고 교관님을 낙마시키려고 했지만 녀석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우리는 이상한 놈이 우리 마장에 들어왔다며 쑥덕이기 시작했다. 어린 우리에게는 녀석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왜냐면 적당한 시기가 되면 우리 중 누군가는 그놈을 기승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왕이면 처음 순번이 내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다른 피해갈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슴’과의 첫 기승
교관님은 막돼먹은 그놈을 한동안 직접 기승을 하셨다. 발광하며 기세등등하던 그놈도 서서히 순치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놈의 눈빛만은 방심의 순간을 노리고 있는 듯했다. 공포의 시간이 여러 날 지나고 교관님께서는 내가 아닌 다른 친구에게 ‘사슴’을 타보라고 하셨다. 그 친구는 마치 못 볼 걸 보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양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러나 어찌하리오. 교관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과 동격이요, 선배의 말과 같을진대. 친구는 조심스럽게 관리사 아저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어린 우리들의 마음을 알고 있던 아저씨는 흔쾌히 그 친구를 도와 안장을 올려주셨다. 말에 오르기 전에 친구는 겁에 질려있는 얼굴을 한 채 도움을 청하는 듯한 눈빛을 우리에게 보냈다. 하지만 우리도 그 친구를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만 친구가 무사하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친구를 태운 그놈은 마치 한 마리의 순한 양처럼 움직였다. ‘걱정 반 기대 반’하며 그 모습을 지켜본 우리는 적지 않은 실망(?)을 했다. 우리는 서로 “별거 아니네”라며 그놈을 평가절하했다. 그리고 기승한 친구의 얼굴은 점차 밝아지며, 의기양양하게 그놈을 자유자재로 기승했다.

그러나 잔잔하고 평화로운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놈은 자기 등에 탄 친구가 못마땅했는지 아니면 무언가를 알아차렸는지 슬슬 본색을 드러내려고 했다. 친구는 상황이 점차 좋지 않게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긴장하기 시작했다. 친구는 온몸이 굳어졌고 이를 알아차린 그놈은 친구를 등에 올려진 보따리로 보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 그놈은 자기 맘대로 마장 이곳저곳 헤집고 다녔다. 손을 쓸 방도가 없고 그놈이 하는 대로 안장 위에서 버티면서 그놈이 베풀어줄지도 모르는 아량을 기대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우리가 기대하던 그놈의 아량은 없었고, 친구는 결국 낙마를 하고 말았다. 그 나쁜 놈은 개선장군인 양 마장 안을 혼자서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다녔다. 실컷 뛰어다니던 그놈은 스스로 지쳤다고 느꼈는지 아니면 내일을 위해 컨디션 조절을 하려는 건지 숨을 고르며 조심조심 자기 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만방자한 그놈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는 따끔한 체벌을 해야 하는데, 혹여 체벌을 어설피 했다가는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방관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연일 계속되는 친구들의 낙마
다음날도 난 행운의 여신의 편에 머물고 있었다. 전날 탔던 친구가 아닌 또 다른 친구가 ‘사슴’ 그놈을 타게 된 것이다.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얼굴 한편에서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다행히 오늘도 그놈을 피했다’ 그놈을 탄 또 다른 친구도 여지없이 농락당하고 말았다. 그 친구는 올라타자마자 ‘사슴’놈이 날뛰는 바람에 나가떨어졌고, 그놈은 밥 먹은 걸 소화라도 시키겠다는 양 꼬리를 한껏 치켜들고 괴성을 질러가며 온 마장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를 지켜보던 교관님은 그놈이 다 뛰기를 기다리셨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기다린 끝에 그놈이 잡히자 그놈을 올라타고 한 시간 이상을 운동시켰다. 그놈에게는 흥진비래(興盡悲來) 격으로 운이 나쁜 하루였을 것이다. 그놈 잘난 척하다 쌤통이다.

결국 돌아온 나와 그놈의 기승
드디어 다음날이 됐다. 이제 내 차례가 오겠구나 생각한 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역시나 다를까 그날은 그놈이 내게 배정됐다. 난 두 관리사 아저씨 중 덩치가 좋고 힘이 센 아저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저씨는 자기 힘을 믿고 손에 놈을 꾀어낼만한 아무것도 들지 않고 그놈을 잡으려 마방 안으로 들어갔다. 매일 안장을 올리기 전에 무언가를 얻어먹던 그놈은 보상이 없는 사실을 알아채자 뒤로 돌아서서는 아저씨가 들어가려고 하면 금방이라도 걷어찰 듯한 자세를 취했다. 위협을 느낀 아저씨는 이내 마음을 바꾸고 돌아가서 사료를 한줌 가지고 왔다. 그놈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방굴레 씌우는 걸 순한 양처럼 받아들였다. 탐탁지 않은 타협으로 안장을 올리고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놈을 기승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놈은 한동안 말을 잘 들었다. 맨 처음 기승한 친구에게 했듯이 한 마리 순한 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슬슬 본색을 드러냈다. 이틀에 걸쳐 난 그놈의 행동과 변화를 충분히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그놈은 전날 뜻하지 않던 불운을 겪었기 때문에 그놈을 제압할 자신이 조금은 있었다. 기승하던 중간중간 그놈은 몸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놈 맘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긴장된 시간 속에 난 나름 만족해하며 운동을 시켰다. 그런데 그 나쁜 놈이 힘이 빠지자 목책 쪽으로 점차 다가갔다. 운동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서 별생각 없이 그놈이 하고 싶은 대로 편안하게 해줬다.

아뿔싸! 그놈은 목책에 다가가자 나무에 자기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다행히 미리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다리를 들어 올려 목책 위에 발을 대고 버텼다. 그놈은 안장이 망가질 정도로 몸을 비벼댔고 내가 고삐를 아무리 당겨도 그놈은 그곳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결국 아저씨를 부르고 나서야 그놈은 그 망할 짓을 멈췄다. 참 대단한 놈이다. 이후 그놈의 그 망할 짓 때문에 우리는 그놈과 항상 거리를 두게 됐고, 그놈은 항상 외톨이일 수밖에 없었다.

‘사슴’의 최고 히트작
그놈의 최고의 히트작은 당시 가좌동에 위치하고 있던 인천승마협회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던 우리는 승마장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인천승마협회에 마방을 빌려 그곳에서 운동을 하게 됐다. 우리는 남양주 금곡에서 인천까지 매일 운동하러 다녀야만 했다. 그때가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것 같다. 한 마리라도 더 운동해야 하는 시기였지만 우리에게는 운동할 시간이 충분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운동을 시키지 못한 말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중에는 못된 ‘사슴’ 놈도 포함돼 있었다. 우리에게 철저히 배척당한 놈은 놀고먹는 날이 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삼 일가량 마방에서 무위도식하던 그놈을 교관님께서 마장 한쪽 구석으로 데려가서 조마삭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교관님께 힘을 실었다. 그리고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그놈이 숨을 헐떡이며 기진맥진해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드디어 운동이 시작됐고, 운동의 강도는 점점 높아만 갔다. 운동의 강도가 높아지자 그놈은 교관님의 눈치를 살살 보며 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교관님이 조마삭 채찍으로 소리를 내어 위협하는 순간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놈은 조마삭 채찍 소리가 귀에 거슬렸는지 갑자기 돌변하더니 교관님을 덮치려고 달려들었다. 불안을 느끼신 교관님은 기다시피 해 마장 밖으로 탈출했다. 그 사건 이후 교관님은 그놈의 난폭함에 혀를 내두르시며 포기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놈은 결국 다른 곳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됐다. 그놈은 팔려갈 때도 차에 타지 않으려고 몇 번이고 도망치기 일쑤였고, 가까스로 차에 태울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같이 쾌재를 불렀고 당시 십 년 묶은 체증이 모두 내려가는 듯했다. 그놈과의 파란만장한 날들은 이렇게 끝났다.



전해 들은 그놈의 악행
그놈이 우리 곁을 떠난 후 한동안 그놈을 잊고 열심히 운동을 하던 어느 날 그놈에 대한 일화가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놈의 모색에 반해서 그놈을 데려간 사람이 한동안은 그럭저럭 운동을 잘하다가 하루는 외승을 나갔다고 한다. 그놈은 외승이 싫었는지 외승 중 주인을 태우고 자기만 빠져나갈 수 있는 나무와 나무 사이로 도망쳐 주인을 낙마시키고 안장을 내동댕이치고 유유히 마장으로 갔다는 믿지 못할 얘기가 전해져왔다. 그 후에 그놈은 자기 명을 다하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정말로 믿어지지 않는 대단한 놈을 만났었던 것 같다. 가끔 우리에게도 어떠한 것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고집스럽게 정면돌파하기 보다는 상황에 맞게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사슴’을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좋은 말일 거라고 생각을 했다. 수놈이긴 했으나 다른 말을 보고 유별난 행동을 하지 않았고, 필로미노(palomino) 모색을 처음 본 우리에게는 신기하고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게 했기 때문이다. 1987년 한국마사회에서 열린 한일승마대회에서 서울2호와 함께.
▲교관님도 그놈의 난폭함에 혀를 내두르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자 악마 같던 ‘사슴’은 결국 다른 곳에 팔려가는 신세가 됐다. 1991년 성남 승마장에서 기억이 없는 말.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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