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식 감독의 ‘나와 함께한 녀석들’(9)


호주에서 온 ‘베린쟈크’
‘베린쟈크’는 내 승마 인생을 다시 쓰게 한 정말 중요한 말이다. 녀석은 김승연 한화 그룹 회장님께서 한국 승마 발전을 위해 호주에서 6두를 구입한 말 중 하나였다. 우리에게는 그 말들과 함께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는데 6두 중 가장 눈에 띄는 말이 ‘베린쟈크’였다. 녀석은 너무 키가 커서 혼자 기승하기가 쉽지 않았다. 발판 위에 올라서야지만 기승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호흡이 잘 맞던 녀석
당시 한국마사회 승마훈련원장님께서 내게 녀석을 탈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주셨다. 그런 말을 탈수 있는 것 자체가 내게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기회였다. 난 운 좋게도 녀석과 호흡이 잘 맞았다. 녀석을 타기 시작하면서 다른 녀석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나 녀석에게 내 온 마음이 집중돼 있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녀석 마방 앞에서 기웃거리거나 서성이며 무언가 다른 일을 하곤 했다.



녀석의 나쁜 습관
그러나 녀석도 좋지 않은 점을 하나 갖고 있었다. 소화불량에 자주 걸리는 위험한 습관이 그것이다. 녀석은 덩치만큼이나 사료를 폭풍 흡입하기 일쑤였고, 이러한 녀석의 식습관은 녀석에게 산통이라는 고통을 안겨줬다. 녀석의 나쁜 식습관을 고쳐보려고 해봤으나 내 바람만큼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산통으로 여러 번 고생을 한 녀석의 고충을 알기에 난 시간이 있을 때마다 녀석 마방 앞에서 녀석과 놀거나 마방을 치워줬다. 습관처럼 자주 녀석의 마방을 드나들다가 보니 녀석에게 산통 발병했을 때 초기에 발견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지금은 산통 수술을 아주 잘하지만 당시에는 말 산통 수술이 여의치 못하던 시기였기에 약물치료나 자연치유 방법으로 산통을 치료할 수박에 없었다. 약품이라야 소염 진통제가 전부였다. 과히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약품들이 심리적으로는 커다란 위안이 됐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수액도 놓지 않았었고, 만약 위장이라도 꼬이는 날이면 치사율 100%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만큼 산통은 치사율이 높은 병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산통에 자주 걸리니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산통 해소책
녀석이 산통에 걸리면 주사도 놓았지만 당시에는 장의 운동을 활발하게 도와주기 위해 조마삭 훈련을 천천히 1시간가량 시켰다. 그래도 산통이 가라앉지 않으면 장운동이 돌아올 때까지 녀석을 끌고 손 평보를 시켰다. 손 평보를 하면서 말이 빨리 배변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던 기억도 새삼스럽게 난다. 녀석에게 산통이 한번 발병하고 나면 회복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번은 조마삭 훈련을 하고 손 평보를 했는데도 장운동이 회복될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난 고통스러워하는 녀석을 끌고 녀석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면서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아침에 발병이 된 산통은 점심을 지나 저녁이 돼도 회복이 더뎠다. 관리사 아저씨도 저녁이 돼 퇴근했고, 동료 선수들도 모두 퇴근했는데 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와 함께 중학교에서부터 승마를 시작해서 줄곧 함께 운동했던 친구만이 남아서 도와줬다. 당시 승마훈련원장님은 승마장 옆에 있는 관사에서 기거했다. 원장님께서도 걱정이 돼 퇴근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수차례 왕래했다.

자장면의 추억
나와 내 친구는 번갈아가며 끝을 알 수 없는 손 평보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드디어 녀석은 방귀를 뀌고 배변도 봤다. 우리는 환호를 했고 친구는 원장님께 말씀드리러 뛰어갔다. 난 미리 받아놓은 물 양동이를 들어 녀석에게 물 마시기를 유도했고, 이에 화답하듯 양동이 반통을 쉬지도 않고 벌컥벌컥 잘도 마셨다. 녀석의 그 모습이 얼마나 고마운지, 잠시 후 원장님께서 확인하러 오셨고 수고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원장님은 말을 숙직하시는 아저씨에게 부탁하고는 우리를 관사로 데리고 갔다. 원장님 댁에 가서 손을 씻고 있는데 자장면이 배달됐다. 아마도 원장님이 미리 주문을 하시고 우리에게 오셨던 것 같았다. 그때의 그 자장면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원장님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져 있는 그 자장면의 맛은 그 어떤 맛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꿀맛이었다. 나와 주변 여러 분들의 정성 때문이었을까? 나와 함께했던 시간동안 녀석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했었고, 녀석은 큰 경기 경험이 없는 내게 대장애물과 표준 장애물 우승이라는 행운까지 가져다줬다.

말은 내 친구
아마도 당시 ‘베린쟈크’를 보면 나뿐 아니라 승마선수라면 어떤 이라도 그렇게 했을 거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언제나 말을 사랑하는 마음. 또 말을 항상 함께하는 소중한 친구를 대하는 마음으로 존중하고 보살핀다면 말도 반드시 보답하는 모습을 보여줄 거란 사실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국가대표 상비군 발탁되다
한동안 인천승마협회에서 운동하던 우리는 말들과 함께 다시 서울승마구락부(동대문 운동장 뒤)로 옮겨 여러 달 운동해야 했다. 난 서울승마구락부에서 한동안 운동하던 중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이 됐다. 당시 국가대표 상비군은 합숙 훈련을 뚝섬에서 했다. 당시에 한국마사회 승마훈련원장님이 호주에서 수입한 말 중에 한 마리를 내 명의로 해서 운동할 것을 제안했다. 월 회비만 내는 조건이었다. 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기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당시에 난 철이 참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우리 집 형편은 내가 매일 서울로 운동하러 다니는 차비를 주기에도 부담이 됐을 정도였다. 지금은 상상하기가 조금은 힘들지만 당시 우리 집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부모님은 아들놈이 한다니까 못 해주신다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날 위해서 힘든 투자를 해주셨다.

내 생애 첫 말
난 전보다 운동을 더욱 열심히 했다. 이제 내게 다른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 거다. 난 이제 녀석의 마주가 된 거였다. 처음 내가 갖게 된 내 말이다. 녀석을 타게 되면서 내게는 행운도 따랐다. 녀석 덕분에 종합마술 국가대표팀에 발탁이 된 것이다. 1985년 초부터 1986년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모든 종목 국가대표 강화 훈련을 실시하게 됐고, 나도 그 일원 중 하나가 됐다. 당시 국가대표 승마선수들은 말을 모두 육군사관학교 군마대에 옮겨놓고 숙식은 태릉선수촌에서 해결하며 육군사관학교로 매일 운동하러 다녔다. 매일 남양주 집에서 뚝섬까지 다녀야 했는데 선수촌에 입촌하니 여간 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운동하러 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니 그것도 내게는 큰 이득이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선수촌에 입촌해 훈련을 하다가 지금의 과천에 있는 한국마사회로 대표팀 캠프가 옮기게 됐다. 1986년 아시안게임 승마경기가 신축된 한국마사회에서 열리기 때문에 현지 적응 훈련을 겸해서 옮기게 됐다. 아직 공사가 완벽히 마무리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훈련할 만했다.

옮긴 훈련지에서의 훈련방식도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무렵, 종합마술팀을 위해 호주에서 헝가리 국적의 외국인코치를 초청해 훈련을 받았다. 지금의 경마장 주로와 그 주변에 연습할 수 있는 X-Country Course를 설치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훈련에 임했고 외국인 코치는 최선을 다하여 지도해줬다. 가끔 직접 내 말을 타주기도 하며 열의와 성의를 다했다.

(스프링마운틴 편은 다음 회에...)


▲언제나 말을 사랑하는 마음, 말을 항상 함께하는 소중한 친구를 대하는 마음으로 존중하고 보살핀다면 말도 반드시 보답하는 모습을 보여 줄 거다. 베린자크, 1984년뚝섬승마장에서.

▲당시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았을 텐데 부모님은 아들을 위해 아낌없는 투자를 해주셨다. 스프링마운틴, 1985년 한국마사회에서.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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