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서울마주협회장배 경마대회 역사

시련을 이겨내고 찾아온 봄처럼 두근두근 설렘 속에 제26회 서울마주협회장배(GⅢ) 경마대회가 3월 11일 렛츠런파크 서울 제9경주로 개최된다.

한국경마 선진화의 출발점이었던 개인마주제 시행이 올해로 25주년의 역사를 맞은 가운데 이날은 제26회 서울마주협회장배와 더불어 경마 선진화를 개척해온 마주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오너스데이(Owner’s Day)’ 행사가 열린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도약’이라는 슬로건 아래 개최되는 ‘2018 오너스데이’ 기념식은 연임에 성공한 서울마주협회 제11대 강석대 회장의 취임식을 겸한 자리로서 250여 명의 마주들과 유관단체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해 서울마주협회의 새로운 출발을 자축할 예정이다.

한국경마 100년의 역사 속에 경마 선진화의 역사를 창조해온 개인마주제와 서울마주협회장배의 역사와 의미를 살펴본다.

경마 본질이자 뿌리인 ‘개인마주제’
렛츠런파크 서울 국산 단거리 최강마를 가리는 제26회 서울마주협회장배 경마대회가 3월 둘째 주 일요일에 열린다.

1993년부터 시작된 서울마주협회장배가 큰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갖는 것은 경마선진화의 기본조건인 개인마주제가 이 땅에서 시작된 첫 출발점이었으며, 한국 국산마 생산 역사가 시작되고, 그 성장의 자양분이 된 것이 개인마주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마주제는 경마의 본질이자 뿌리이며, 경마산업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지난해는 경마혁신안의 진통과 국정농단 사태 등 한국경마의 대혼란 속에 경마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몇몇 사건들이 논란이 되었기에 개인마주제 전환 25주년을 맞아 경마 선진화의 역사를 성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경마는 본래 ‘왕의 스포츠, 스포츠의 왕(Sports of King, King of Sports)’이라 불리며 마주들의 문화로부터 파생된 정통 대중 레포츠이다. 귀족 출신 마주들의 작은 내기에서 시작돼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경마의 기원은 중세기 영국의 왕후·귀족들 사이에서 소유마필의 능력과 자신의 기승술을 과시하는데서 비롯되었기에 경마는 곧 마주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즉, 경마 탄생의 중심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마주들이 존재하고, 그 마주들의 말들이 마주의 명예를 위해 달리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기에 경주마는 곧 마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 경마선진국들은 모두 개인마주제를 기본 전제로 성장, 발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경마를 위해서는 반드시 개인마주제에 뿌리를 둔 경마만이 통한다. 인류의 오랜 문화유산인 경마가 세계 곳곳에서 문화이자 산업으로 성장하고 뿌리내린 데는 경마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기본 전제조건으로 하는 개인마주제가 기본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경주마 생산 역사와 서울마주협회장배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시작된 불완전한 경마역사로 1993년에야 후진적 경마체제인 시행체마주제에서 개인마주제로 전환, 진정한 경마선진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그 개인마주제 시행을 알리는 축포가 바로 ‘서울마주협회장배’였다. 100년을 달려온 한국경마의 역사에서 비로소 선진화가 시작된 1993년은 한국경마의 대변혁이자 민주화였으며, 경마인 모두가 화합하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개인마주제의 시행과 함께 지난 1993년 8월, 제1회 서울마주협회장배가 개최되었고, 김현래 마주의 ‘쇼파라’가 우승하며 서울마주협회장배의 첫 역사를 장식했다. 이후 ‘섭서디’ ‘워로마’ ‘동반의강자’ ‘지금이순간’ 등 서울마주협회장배를 통해 한국경마사에 남을 명마들이 배출됐다.

한편, 개인마주제 이전 과거 우리의 경마는 국산마 생산이 전무했으며, 일본산마 등 외국의 경주를 수입해 경마를 시행했다. 1990년대 당시 경마가 본연의 스포츠성보다 베팅 위주의 ‘도박’으로 왜곡되면서 경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이윽고 마사회는 특단의 대책으로 개인마주제를 통해 한국경마의 쇄신을 모색,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마주로 영입했고, 새로운 기대와 희망 속에 개인마주제가 시작되었다. 마주 계층의 탄생과 더불어 본격적인 프로화시대가 열렸고, 경마의 투명성, 공정성이 확보되면서 괄목할만한 매출 신장도 이루어졌다. 특히, 초창기 원년 마주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마주활동을 시작, 수많은 시행착오와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혼이 있는 경마’, ‘국적 있는 경마’를 주창하며 국산마 생산의 역사도 이 시기부터 본격화되었고, 마주들의 국산마 구매는 국산마 생산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마사회와 몇몇 농가에서만 시범적으로 생산되었던 국산마는 개인마주제 전환에 따른 수요 증가와 마사회·농림부가 추진하던 ‘국산마 자급확대 중장기 기본계획’에 따른 생산지원 정책에 따라 번식마 보유 및 생산두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개인마주제 시행에 힘입어 경마는 산업적 가치를 얻게 된 것이다. 개인마주제 25년의 역사를 경마선진화의 역사이자 국산마 진흥의 역사라 일컫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서울마주협회장배 역대 우승마]


한국 경마 개인마주제 변천사

[1920년대-해방 전]
1920년대 우리나라의 경마는 일제 강점기 식민지 치하에서 우민정책 중 하나로 도입되면서 왜곡된 역사적 배경 속에 태동했다. 1922~1945년은 일본인 마주시대였다.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경마시행체인 ‘사단법인 조선경마구락부’가 발족되면서 입장권과 마권이 발매되고 상전경마도 시행되는 등 근대경마로서의 면모를 조금씩 갖추게 된다. 당시 경마는 용산 일본군 연병장과 한강 모래사장에서 1년에 6일에서 8일 동안 개최되었고, 기력이 다 된 군용, 농업용, 운송용 말들이 경주마로 쓰였다. 당시 마주는 일본인 마주가 대다수였고 한국인 마주(친일파)는 몇 명에 불과했다. 이후 한강경마장은 신설동경마장으로 이전되었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할 무렵 조선경마구락부는 해체되고, 단일 경마시행체인 ‘조선마사회’가 설립되지만 이때까지도 경마는 일본인 마주에 의해 시행되었다.


[1945-1954년]
1945~1954년은 폐허 속에서 한국인에 의한 경마가 시작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으며 조선마사회는 ‘한국마사회’로 출발하게 되며, 한국인 마주, 한국인 조교사와 기수에 의한 한국경마가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나 1950년 6월 25 전쟁으로 신설동경마장은 문을 닫게 된다.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1954년 8월 뚝섬 경마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전후 극심한 정치, 사회적 혼란과 국력 쇠퇴로 경마 역시 불황을 벗어나지 못했다.


[1955-1965년]
1955~1965년에는 개인마주제와 시행체마주제가 병행되었다. 마사회는 1957년 일본산 개량마 100두를 수입하여 마주에게 분양하고 미분양된 말은 마사회가 직접 소유함으로써 개인마주와 시행체 마주가 공존하게 되지만 공정성을 가장 중요시하는 경마에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1966-1990년]
1966~1970년은 개인마주가 모두 소멸되고 마사회와 법인마주인 덕마흥업이 ‘양대마주제’를 시행하게 된다. 그러나 점차 덕마흥업의 횡포가 심해지며 마사회가 만성적자 상태에 놓이게 되고, 덕마에 의한 ‘독점 법인마주체제’로 바뀌게 된다. 1970년대에 들어 경마는 30%가 넘는 성장세를 보이게 되지만 한국경마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사기업 마주체제의 폐단과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1972년 제15대 김동하 마사회장은 독점 법인마주체제의 폐단을 없애고, 경마운영의 쇄신을 위해 덕마흥업의 경주마와 시설일체를 반강제적으로 인수하고, 마사회 중심의‘시행체 단일마주제’가 1972~1990년까지 시행된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승마대회를 치루기 위한 승마경기장이 마사회에 의해 과천에 건설되고, 양 대회가 성공리에 끝난 후 승마경기장은 경마장으로 용도 변경되어 1989년 9월 1일 과천 서울경마장 시대가 열린다. 과천 새 터전에서 90년대를 맞이한 마사회는 매출액과 입장객이 증가하지만 사회적으로 부정경마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 인식이 극에 달하여, 정부와 국회, 국민으로부터 ‘개인마주제’ 시행의 압박을 받게 된다.


[1991-1993년]
1991~1993년 마사회는 개인마주제 시행에 대해 준비를 시작하지만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시행체의 마주병행제도는 경주편성과 재결을 마주가 하는 셈이었으니 경마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국제적으로도 웃음거리가 되었다. 각종 부정경마 사건과 조교사, 기수의 자살사건 등으로 경마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국민적 불신이 깊어지자 마사회는 결국 3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1992년 4월 마주를 모집, 경마에 대한 부정적 인식개선을 위해 사회 저명인사들을 마주(총 441명)로 영입하게 된다.


1993년 7월 마사회가 소유하고 있던 경주마가 마주들에게 분양되면서 오랜 산고(産苦) 끝에 1993년 8월 14일 한국경마의 대변혁이었던 개인마주제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자료 제공= 서울마주협회·정리= 이용준 기자 cromlee21@horse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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