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쿠르딩 곰파의 대웅전 모습. 

마룻장을 울리는 힘찬 맷돌 소리에 잠 깨어 눈을 떠보니 아직 여명이었다. 건너편 침상의 쿨리들과 내 옆 침상의 총누리는 아직 잠에 취해있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쌀 씻는 소리에 잠이 깼던 때가 엊그제처럼 떠올랐다. 소변이 마려웠지만 침낭에서 빠져나오기 싫어서 다시 눈을 감았다.  

맷돌 소리는 여전히 힘차게 들렸다. 규칙적인 호흡과 일정한 박자를 정확하게 따르고 있는 것으로 봐서 멧돌을 돌리는 사람은 부인이다. 부인은 불교의 진언을 마음속으로 뇌이며 맷돌을 돌리는 듯 했다. 나도 맷돌 도는 박자에 맞추어 옴마니밧메훔을 뇌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잠에서 다시 깼을 때 맷돌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아침이 환하게 밝아있었다. 앞산 능선이 푸른 하늘 아래 눈부셨다. 밤새 내린 눈으로 설화雪花를 피운 나무들 너머 아득한 능선 위에 킹쿠르딩 곰파도 보였다. 곰파 반대편의 먼 하늘 아래는 눈 쌓인 피케 영봉이 보일락 말락 했다.  카트만두 빌라에베레스트의 앙 도로지 셰르파도 한 때는 킹쿠르딩 곰파의  승려였다는 얘기가 뇌리를 스쳤다.    

 

아침 식사는 짬바와 소찌아였다. 짬바는 맷돌로 갈아 가루로 만든 곡식의 총칭이다. 여명 무렵에 들었던 힘찬 맷돌 소리는 짬바를 만들기 위해 통보리를 가는 소리였다. 양재기에 담아 내온 짬바에 뜨거운 소찌아를 조금씩 부어가며 수저로 저어서 걸쭉한 반죽을 만들어 떠먹는데, 아무 맛도 없고 목에 걸리는 느낌이 들어 소찌아를 많이 마셔야 했다. 저녁에 마시다 남은 옥수수 락시도 따듯하게 데워서 다들 한잔씩 들이켰다

 

어차피 떠나야 할 나그네들은 뭉그적거리지 말고 빨리 궁둥이를 털어야 한다. 주인집 식구들은 할 일이 많다. 향로를 들고 아래층 불단에 치성 드리러 내려가는 님이 셰르파와 덴지 셰르파를 따라 나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 집의 불단은 어제 우리가 잔 침대 방 창가에 모셔져있다. 님이는 불단 앞에서 향로를 흔들어 연기를 피웠다. 향로에서 피어난 향 연기는 사람을 숙연하게 한다. 어린 님이 셰르파의 치성도 숙연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지팡이를 짚고 문을 나서자 겔부 셰르파가 나타나 곰파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주겠다며 앞장섰다. 겔부가 인도한 지름길은 물레방아 골짜기로 이어졌다. 물레방아는 산비탈에 흩어져있는 여러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쓰는 것이어서 사방에서 길이 모이고 흩어지는 로터리 구실을 하고 있었다.

 

겔부는 물레방아 위쪽 비탈로 이어진 작은 오솔길로 올라서더니 건너편 능선을 가리켰다. 능선 밑에 집들이 있는데 산중에서 그만하면 규모를 갖춘 집도 보였다. 그 집이 킹쿠르딩 곰파였다. 겔부는 거기서 돌아섰다. 총누리에 의하면 겔부는 진작 외양간의 소들을 풀밭에 풀어놓아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를 따라다니며 이 마을 저 마을 구경도 하고 마침내 카트만두에도 가보고 싶겠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겔부처럼 소를 먹이고, 감자밭 갈고, 땔나무 하러 다녔던 총누리는 겔부의 그런 심정을 잘 알기에 어깨를 다독여주며 친형처럼 굴었다. 겔부와 헤어진 지점에서는 킹쿠르딩 곰파뿐만 아니라 피케 영봉도 멀리 내다보였다. 킹쿠르딩 곰파가 있는 뎀바단다 능선이 뻗어 내려온 먼 북쪽의 봉우리가 바로 피케 영봉이었다. 피케 영봉 쪽 능선에는 이쪽보다 더 많은 눈이 쌓여있었다.

 

총누리가 엊그제 셰르파 호텔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지난주에 내린 폭설 속에서 셰르파 한 명이 얼어 죽은 곳도 그쪽이라고 했다. 죽은 셰르파는 술에 취해있었고, 눈이 많이 오니 자고 가라는 곰파 스님의 만류를 마다하고 눈길을 나섰다가, 며칠 후 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폭설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탈진하여 잠이 들었고, 결국 저체온증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하늘은 청명하고, 나목 숲의 설화가 햇빛을 반사하여 눈부시게 밝은 아침에 산중을 걷는 게 상쾌했다. 우리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눈 쌓인 곰파 마당에 도착했다. 킹쿠르딩 곰파가 위치한 땅은 솔루쿰부가 아니라 오컬둥가 땅, 우리는 이미 오컬둥가 땅에 들어선 것이었다. 총누리는 나를 자기 고향의 곰파에 안내한 것이 자못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곰파는 아무도 살지 않는 듯 너무나 조용했다. 마당에 쌓인 눈에는 사람이 내왕한 발자국도 없었다. 곰파 주변에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백 채 가량의 판잣집 또한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곰파 마당에 서있는 탑에는 페인트로 그려진 낫과 망치, 즉 공산당 심벌과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는 구호가 적혀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대문니 두 개가 다 없는 노파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총누리가 그 노파와 무슨 말인가 주고받더니 같이 곰파로 가서 대문을 두드렸다. 한참 만에 소년 승려가 문을 열어주었고 노파는 눈길을 헤치고 마을로 내려갔다.

 

우리는 소년 승려를 따라 고드름이 뚝뚝 떨어지는 회랑을 돌아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올린 후, 2층 회랑 구석에 있는 어떤 방으로 갔다. 솜이불이 새 둥지처럼 말려있고 그 앞에 경전과 염주가 놓여있는 것으로 미루어 소년 승려는 좀 전까지 그 솜이불을 두르고 앉아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킹쿠르딩 곰파는 오컬둥가 지방에서 가장 큰 곰파라고 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수백 명의 승려가 상주하면서 오컬둥가 지방 주민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주지 스님인 링포체 부부가 카트만두의 보우다로 거처를 옮긴 후로 다른 승려들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카트만두로 떠났다고 했다.

 

산중은 경제가 어렵고 병원도 없다. 승려가 병이라도 나면 약 한 첩 못 쓰고 앓다 죽는 수밖에 없어 다들 카트만두로 나간다고 했다. 좋은 환경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뿐더러 운이 좋으면 외국에 갈 기회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곰파에서 공부했던 총누리의 동생도 같은 이유로 카트만두 부근의 곰파로 떠났던 것인데, 작년에 환속하고 말았다. 장차 트레킹 가이드가 되기 위해 지금은 포터로 일하고 있다고.  

 

총누리는 일 년에 한 번 꼴로 승려들이 이 곰파로 돌아와 마을 주민들을 위한 큰 법회를 벌이며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법회가 점점 시들해지다가 결국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총누리는 소년 승려에게 차를 청했고, 소년 승려는 버터도 없고 우유도 없어서 깔로찌아(블랙 티)밖에 없다며 화덕으로 가서 불을 피웠다.

 

그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다른 두 소년 승려가 올라와 얼굴을 내밀었다가 돌아갔다. 킹쿠르딩 곰파를 지키는 승려는 그렇게 세 명의 소년 승려뿐이었다. 그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절을 지키는 임무를 다른 승려들과 교대한다고 들었다. <계속>

너와집. 널 사이로 연기가 삐져나온다. 집안에서 모닥불을 때서 밥을 짓나보다.
사진 왼쪽 먼산의 가장 높이 보이는 두 개의 봉우리가 피케 1, 2.
밤새 내린 눈이 랄리구라스 나무를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장식했다. 랄리구라스는 네팔 국화.

억지로 번역을 하자면 석경담이다. 경전을 새긴 넓적한 돌들로 담을 쌓았다는 뜻이다. 데우라리 언덕에서도 이미 이런 마네를 보았거니와 우리가 간 길 도처에서 계속 이런 마네를 만났다.

킹쿠르딩 곰파에서 수행하는 승려의 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승려들은 각자 자기 처소에서 자취를 하면서 곰파를 왕래하며 공부한다. 20072월 현재는 대부분 비어 있었지만 한 때는 수 백 명이나 되는 스님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고 들었다.

방금까지 소년 승려가 앉아있던 자리.
절 마당의 탑. 정면에 마오이스트의 구호가 페인트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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