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뜨레 고개(2,343미터)를 넘어 마리 마을이 저만치 보이는 길목에 두 사내가 탁자를 놓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들의 탁자는 붉은 천으로 덮여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냥 붉은 천이 아니라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는 공산당 깃발이었다.

토끼장과 호박. 

 

410분에 기상, 530분에 롯지를 빠져나왔다. 이제 막 동트기 시작한 길을 걷자니 상쾌했다. 새털처럼 가벼운 침낭과 우모복 등으로 부피만 큰 배낭이건만 비탈길을 오르자니 묵직했다내 뒤에 오는 김 선생 사정도 나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앙 다와는 앞장서서 걷다가 언덕바지 꼭대기에 이르면 한참씩 서서 기다렸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등지고 자신의 긴 그림자 끝에 우뚝 서 있는 그의 실루엣은 강인하고 믿음직해 보였다.

 

치뜨레의 주막집에서 차를 마셨다. 지난 봄 순례 때 총누리와 함께 들렀던 주막집이다. 근처에 다른 주막집도 많은데 빠쁘레 사내들이 꼭 이 주막집에 들르는 이유는 주인이 빠쁘레 출신의 셰르파이기 때문이다.

 

치뜨레 고개(2,343미터)를 넘어 마리 마을이 저만치 보이는 길목에 두 사내가 탁자를 놓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들의 탁자는 붉은 천으로 덮여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냥 붉은 천이 아니라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는 공산당 깃발이었다. 물어보나마나 이들은 이 지역의 마오이스트 공산당원이었다.

 

잘생긴 젊은이는 영어를 곧잘 했다.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의 사내는 오직 네팔 말만 했다. 둘이 번갈아 가며 꽤 긴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네팔 인민 해방 기금'을 징수하는데 협조해 달라는 얘기였다. 1인 당 1 천 루피씩 2 천 루피를 내고 영수증을 받았다. 늙수그레한 사내는 영수증 뒤에 더 이상의 기금을 징수하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자신의 이름과 핸드폰 번호를 적었다. 젊은이가 그 사내로부터 영수증을 받아 우리에게 내밀며 영어로 말했다.

 

- 만일 누군가가 또 다시 기금을 협조해 달라고 하면 이걸 보여 주세요.

 

 

시바라야의 개울. 봄에는 네팔 종이 원료 추출 작업장이었다.    

 

 

마리 마을을 지나고, 널따란 시냇물을 가로지르는 줄다리를 건너 시바라야에 도착한 때는 11. 지난 봄 순례 때 인연을 맺었던 롯지의 마당에서 차를 마셨다. 아침을 거른지라 배가 고팠으나 밥은 안 먹기로 했다. 윗마을인 상보단다까지는 비탈이 심해서 배부르면 걷기가 몹시 힘들 것 같아서였다.

 

롯지의 주인 앙 리마 셰르파가 나에게 사진을 가져 왔냐고 물었다. 지난 봄에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진을 프린트해서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한 기억은 없었지만 은근히 미안했다. 그래서 변명을 하다 보니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급히 오느라고 못 가져왔지만 다음에 올 때는 꼭 가져 오겠다고…….

 

비지땀을 쏟으며 상보단다에 도착한 시각은 1. 전망 좋고 평탄한 길가에 있는 주막집 앞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주막집 안에는 토끼장이 있고, 토끼장 위에는 호박을 올려놓았다. 주인아주머니 얼굴과 부뚜막을 보니 지난봄에 총누리와 함께 라면으로 요기했던 곳인데 그 때 토끼장을 봤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주막집 부엌의 셰르파니. 

 

달밧떨커리. 녹두죽(달), 흰밥(밧), 채소 반찬(떨커리).  

 

 

주인 아주머니가 새로 지어 준 달밧떨커리로 아침을 겸한 점심을 해결했다. 김 선생도 나처럼 식성이 좋았다. 그는 음식 맛을 일일이 음미하며 먹는 미식가이지만 음식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거칠면 거친 대로 독특한 맛이 있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음식이 너무 짜면 곤경에 처한 표정을 지었다.

 

오후 4시 경에 데우라리(2710 미터)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봄에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묵었던 집이다. 안주인은 안 보이고, 남편이지 싶은 사내와 그의 딸이지 싶은 여학생이 보였다. 김 선생은 롯지의 주방에서 더운 물을 얻어 샤워를 했다.

 

나는 난롯가에 앉아 따끈하게 데운 락시를 홀짝였다. 어두워 진 후에 저녁을 먹었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늘 그렇지만 이런 산중의 밤에는 술 마실 일 말고는 할 일이 별로 없다. 김 선생과 나는 피차 술을 자제하기로 하였기에 술은 한두 잔으로 그치고 일찌감치 침낭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계속> 

 

 

네팔 사람들은 싹이라고 부르는 갓배추가 주막집 텃밭에서 싱싱하게 자란다.

 

염소들. 

 

앙 다와 셰르파.  

 

앙 다와 셰르파, 주막집 문을 화려하게 장식한 한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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