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코로나의 영향으로 닫혔던 하늘의 길이 열리면서 나라 간의 왕래가 조금은 자유롭게 시작되었고 그런 시기의 틈을 탄 필자는 10월 첫째 주 도쿄 경마장을 기분 좋게 방문하고 돌아왔다. 

일본 경마의 역사를 보존시켜 놓은 경마 박물관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3세 클래식 최고의 정점 일본 더비와 오크스가 개최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경마장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로즈가든이라는 곳이 있는데 아름다운 장미꽃과 함께 일본 더비 역대 우승마들의 사진과 말들의 역사를 풀어주는 설명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로즈가든 입구에는 일본 더비 우승마를 대표하는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오늘 필자가 다루려 하는 제74회 일본 더비 우승마 “보드카”이다.

 

영상=유튜브 カンテレ競馬【公式】(바로가기)

 

먼저 그녀라는 단어를 쓰면서 시작하려 하는데 이유는 바로 보드카가 암말이기 때문이다. 암말로서 수말들의 최고봉인 일본 더비를 우승하면서 JRA 경마 역사상 암말의 더비 우승 3번째라는 기록을 세운 레전드 호스이다. 더욱이 1937년 히사토모(Hisatomo), 1943년 쿠리후지(Kurihuji) 이래 64년 만의 쾌거로 전쟁 후 달라지고 발전한 근대 경마 역사에서는 처음 일궈낸 놀라운 결과이기도 하다. 

“보드카”, 이름만 들어도 풍겨 나오는 알코올의 느낌으로 취할 것 같은 도수 40%를 넘나드는 대표적인 유명한 증류주(蒸溜酒)의 이름이다. 멋지고 좋은 이름이 많건만 아름다운 암말에게 어찌해서 보드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그 유래를 얘기하자면 이렇다. “보드카” 에게는 일본 더비를 우승한 부마가 있었는데 그 부마의 이름이 타니노김렛(Tanino Gimlet) 이었다. 타니노는 마주 타니미즈유조(谷水雄三)씨의 관명이며 김렛은 알코올 도수 30%의 진 베이스에 라임 주스를 섞어서 진 자체를 묽게 한 칵테일인데 마주가 ‘어지간히 알코올을 좋아했나보다’ 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마명(馬名)의 유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타니미즈 마주는 “보드카”가 부마인 타니노김렛 보다 더 강한 경주마가 되기를 기원하는 바람으로 탄산이나 물을 섞지 않고 40% 도수의 순수한 증류주와 같이 강하게 성장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타니노라는 관명을 더하지 않고 마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강한 이름을 얻은 “보드카”는 마주의 바람답게 레전드 서러브레드로 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성장을 가장 많이 뒷받침한 인물이 바로 “보드카”가 지닌 경주마의 높은 포텐셜을 알아본 스미이카츠히코(角居勝彦) 조교사였다. 2001년 마사를 개업한 이래 2005년 일본과 아메리카의 오크스를 석권한 시자리오(Cesario) 와 같은 명마들을 육성한 당대 가장 핫 하면서도 유명세를 탔던 스미이 조교사는 “보드카”를 처음 본 순간 더비 말이 될거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확신해서 시작한 “보드카”의 경주 마생이 그렇게 쉽게 풀린 것은 아니었다. 신마전 우승을 시작으로 암말 2세 챔피언에 가볍게 등극했지만 3세가 되어 도전한 첫 클래식 타이틀인 오카쇼(桜花賞) 에서 세기의 라이벌이었던 다이와스칼렛(Daiwa Scarlet) 에게 패하면서 더비에 대한 방향성을 고려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스미이조교사의 단호한 결단력으로 더비에의 출주를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2004년에 태어난 서러브레드의 최고 정점을 찍을 수 있었다. 

당시 아무리 “보드카”가 유능하다 해도 17마리의 수말들 사이에서 이길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심지어 중계를 보는 필자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운명의 연결이라고 해야 할까? “보드카”는 아버지 타니노김렛과 같은 3번 게이트 배정을 받았고 3코너까지 중간 자리를 지키며 힘을 보전하다가 마지막 직선이 길어서 험악하다고 유명한 도쿄 경마장의 4코너 라스트 400m를 치고 나오면서 무려 3마신 차로 우승을 했고 부녀간 일본 더비 제패가 처음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부자간의 제패는 그래도 가능성을 볼 수 있었지만, 부녀간 제패는 아마도 이후에도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07년 5월 27일 일본 더비 당일, 도쿄 경마장에는 지금의 일본 천황인 나루히토(徳仁) 황태자가 레이스를 직관하였는데 시이히로후미(四位洋文) 기수와 보드카가 위닝 런을 마치고 정면 스탠드 중앙에서 황태자를 향해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고 필자는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에게 없는 것이 이런 걸까? 라는 묘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대통령배가 있어도 대통령이 경마장에 출현할 일은 아마도 100년 후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보드카”는 26전 10승 GⅠ 7승, 총상금 13억 4870만엔을 벌어들였고, 현역시절 두 번이나 연도대표마에 선출되었다. 2011년에는 JRA 현창마(顕彰馬)에 선정되었는데 현창마 선정은 경마 각 분야의 명예의 전당 입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1984년부터 실시되기 시작한 제도이다. 10년 이상의 경마 보도 관계의 경력을 지닌 메디아나 신문기자 등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고 전체 투표 4분의 3 이상의 득표를 얻어야만 선출되기 때문에 엇갈리는 투표로 인해 대상 말이 없는 연도도 속출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선정된 현창마는 도교경마장의 경마 박물관에 동상과 함께 찬란한 마생을 담은 스토리가 전시되게 된다. 

필자도 도교 경마장에 방문했을 때 현창마관을 관람했었다. 1시간을 넘게 보면서 초대 현창마인 쿠모하타(KumoHata), 토사미도리(TosaMidori)를 비롯해 근대 경마 붐의 주인공이었던 하이세이코(Haiseiko)와 오그리캡(OguriCap) 그리고 전설을 이어온 티엠오페라오(T.M Operao), 딥임펙트(Deep Impact), 오르페브르(Orfevre)등 34마리의 화려했던 레전드 호스들의 스토리를 보고 생각할 수 있는 매우 뜻깊었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어디까지 경마에 대해 진심인지 JRA와 일본 경마팬들의 마음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2010년 은퇴를 한 후 아일랜드와 프랑스에서 번식 암말로 제2의 마생을 보내던 “보드카”는 2019년 4월 1일 거짓말 같은 죽음의 소식을 전하면서 무지개 다리를 건너버렸다. “보드카”의 2007년 일본 더비 우승 후 암말에 의한 출주의 도전은 몇 번 있었지만 그렇다 할 성과없는 레이스가 계속되는 가운데 그럴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위대한 호스인지에 대해 되짚어 생각하게 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운 그녀 “보드카”가 지금 너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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