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홍콩, 그리고 이제는 사우디로

오는 2월 23~24일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상금이 걸린 경주인 사우디 컵(Saudi Cup, G1)을 비롯해 유수의 경주가 열리는 사우디 컵 미팅(Saudi Cup Meeting)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출신 말 외에도 미국, 일본, 영국, 홍콩 등 전 세계의 준마가 거액의 상금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칠 예정이다.

오늘 소개할 말은 총상금 2,000만 달러의 사우디 컵에 출전하는 말은 아니다. 정확하게는 이 말은 사우디 컵에 출전하려고 준비했다가 막판에 네옴 터프 컵(Neom Turf Cup, G2)에 대신 출전하기로 했다. 물론 네옴 터프 컵에 걸린 총상금도 200만 달러로, 어지간한 G1 경주보다 더 많은 상금이 걸려있는 큰 규모의 경주다.

그런데 이 말의 경력이 특이하다. 아일랜드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자연스럽게 영국에서도 경주를 치렀다. 제법 성적을 낸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개선문상(Prix de l'Arc de Triomphe, G1)에도 출주했다. 그런데 이 말의 세계 여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23년 12월에는 홍콩으로 날아가 혈전을 펼쳤고, 이제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다시 우승을 노린다. 오늘의 주인공은 2019년에 태어난 말, 룩셈부르크(Luxembourg)다.

(출차: Getty Images)
(출차: Getty Images)

룩셈부르크의 부마는 몬쥬(Montjeu)의 자마 카멜롯(Camelot)이다. 개선문상마 몬쥬라는 이름만 해도 대단하지만, 카멜롯의 모부마는 뛰어난 종마 킹맘보(Kingmambo)이다. 즉, 룩셈부르크에는 전 세계를 주도한 종마의 양혈이 흐르고 있다. 카멜롯 또한 클래식 시즌에 2,000기니(2,000 Guineas), 더비(Derby), 아이리시 더비(Irish Derby)를 따냈으며, 세인트 레저 스테이크스(St. Leger Statkes)에서 3/4마신차 2착을 기록하며 삼관을 간발의 차이로 놓친 준마이다.

이러한 혈통에 걸맞게 룩셈부르크는 2세 시절부터 눈에 띄었다. 7월 킬라니(Killarney)에서 치른 데뷔전에서 가볍게 2마신차 승리를 기록했고, 이어 9월 커레(Curragh)에서 치른 G2 베레스포드 스테이크스(Beresford Stakes)도 가뿐하게 우승했다. 그리고 10월 동커스터(Doncaster)에서 열리는 2세마 최강자전 G1 퓨처리티 트로피(Futurity Trophy)에서도 1 3/4마신차 낙승을 거뒀다. 이때 룩셈부르크의 배당률이 4/6였는데, 2번 인기인 베이사이드 보이(Bayside Boy)의 배당률이 9/2였다. 정말 많은 사람이 룩셈부르크가 손쉽게 우승할 것을 예상했다. 룩셈부르크는 동커스터(Doncaster) 경마장 1마일 직선 코스를 거침없이 질주하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2021 Futurity Trophy(G1), Doncaster, 1m Straight, Soft

일약 삼관마 후보로 떠오른 룩셈부르크는 클래식 시즌에 전초전 없이 곧바로 2,000기니로 향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고돌핀이 자랑스럽게 내세운 코레이부스(Coroebus)와 네이티브 트레일(Native Trail) 두 마리에게 밀리며 3착에 그치고 만다. 주력에서도 밀렸지만, 출발에서 실수한 것을 만회하지 못한 점이 뼈아팠다. 

룩셈부르크 진영은 삼관 노선을 포기하고 대신 고마들과의 대결을 준비했다. 석 달간의 휴식 이후 8월 커리(Curragh)에서 열린 G3 로얄 휩 스테이크스(Royal Whip Stakes)를 우승한 룩셈부르크는 다음달 레퍼즈타운(Leopardstown)에서 열린 아이리시 챔피언 스테이크스(Irish Champion Stakes)에 도전했다. 상대한 주요 말로는 파리 그랑프리(Grand Prix du Paris) 우승마 오네스토(Onesto), 이클립스 스테이크스(Eclipse Stakes) 우승마 바디니(Vadeni), 인터내셔널 스테이크스(International Stakes) 우승마 미슈리프(Mishriff)가 있었다. 쟁쟁한 경쟁마들과 경주 내내 자리싸움을 이어간 룩셈부르크는 마지막 펄롱에서 선두로 치고 나왔고, 오네스토와의 선두 경쟁을 끝내 이겨내면서 짜릿한 우승을 차지했다. 

2022 Irish Champion Stakes(G1), Leopardstown, 1m 2f, Soft

영국에서 G1 두 번, 아일랜드에서 G1 한 번 우승한 룩셈부르크는 다음 목적지로 프랑스를 선택했고, 과감하게 개선문상에 도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눈에 띄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7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처음으로 입상에 실패하면서 알피니스타(Alpinista)가 G1 6연승 하는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룩셈부르크의 부진은 이어졌다. 2023년 시즌 복귀전에서 7두 중 다섯 번째로 들어왔다. 주전 기수 라이언 무어(Ryan Moore)가 빠졌기도 했지만, 그래도 자신보다 레이팅이 10 넘게 차이가 난 말들과의 대전에서 패배했기에 상당히 뼈아팠다. 그런 상황에서 출주하게 된 G1 태터솔스 골드 컵(Tattersalls Gold Cup). 바디니와 챔피언 스테이크스(Champion Stakes) 우승마 베이 브리지(Bay Bridge)에 이어 3번 인기가 된 룩셈부르크는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변화를 선택했다. 룩셈부르크는 중단에서 전방을 지켜보다가 막판에 역전하는 경주를 펼쳐왔는데, 이번 경주에서는 시작부터 페이스를 이끌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두를 내주지 않았고, 경쟁마들의 추격을 끝내 뿌리치면서 우승했다. 

2023 Tattersalls Gold Cup(G1), Curragh, 1m 2 1/2f, Good

한 달 후 애스콧(Ascot)에서 열린 G1 프린스 오브 웨일스 스테이크스(Prince Of Wales's Stakes)에서는 다시 1번 인기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번엔 도주 전략이 먹히지 않았다. 대상경주에서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유독 G1 우승과 거리가 멀었던 모스타다프(Mostahdaf)에게 2펄롱을 남기고 따라잡히면서 2착에 그치고 말았다. 

룩셈부르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G1 킹 조지6세 & 퀸 엘리자베스 스테이크스(King George VI & Queen Elizabeth Stakes)에 나섰다. 무어 기수는 오귀스트 로댕(Augeste Rodin)에 기승하기로 하면서, 2세마 때 G2를 함께 우승한 시미 헤퍼넌(Seamie Heffernan) 기수와 오랜만에 합을 맞췄다. 출주마 10두 중 7두가 G1 우승 경험이 있을 정도로 라인업이 쟁쟁했는데, 룩셈부르크는 시작부터 끝까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4착했다.

무너질 것처럼 보인 룩셈부르크는 아이리시 챔피언 스테이크스 왕좌를 지키러 레퍼즈타운으로 향했다. 가장 강력한 도전자는 오귀스트 로댕. 무어 기수는 이번에도 오귀스트 로댕을 선택했기에, 룩셈부르크는 헤퍼넌 기수와 또다시 합을 맞췄다. 강선행을 펼친 룩셈부르크를 오귀스트 로댕이 따라가는 형태로 경주가 이어졌고, 마지막 펄롱에서 둘은 일기토를 펼쳤다. 그러나 오귀스트 로댕의 힘이 더 강했다. 룩셈부르크는 비록 반마신차로 졌지만, 아직 저력이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이렇게 2023 시즌을 끝낼 것처럼 보인 룩셈부르크는 돌연 홍콩행을 발표했다. 12월 10일 홍콩 샤틴(Sha Tin) 경마장에서 열리는 G1 홍콩 컵(Hong Kong Cup)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2022년 홍콩 컵 우승마 로맨틱 워리어(Romantic Warrior)가 세계의 도전자를 기다린 가운데 룩셈부르크는 다시 무어 기수와 합을 맞췄다. 비록 우승하진 못했지만 최종 직선에서 굉장한 주력을 선보였으며, 2연패를 달성한 로맨틱 워리어와의 차이는 고작 목 하나였다. 

2023 Hong Kong Cup(G1), Sha Tin, 1m 2f, Good

경주마 경력 초반 뛰어난 주력과 그에 걸맞은 성적으로 많은 인기를 누린 룩셈부르크는 최근엔 우승이 없지만 당대 최강으로 불리는 말들과 접전을 이어가면서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다. 게다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주로 쓰던 각질을 바꿔보기도 했으며, 새로운 전략을 써서 우승하기도 했다.

만약 룩셈부르크가 처음 발표한 것처럼 사우디 컵에 도전했다면 사우디 원정뿐만이 아니라 더트로 종목을 전환하는 도전도 했을 것이다. 사우디 컵은 킹 압둘아지즈(King Abdulaziz) 경마장의 더트 코스에서 열리지만, 2021년 우승마 미슈리프와 2023년 우승마 판탈라사(Panthalassa)가 잔디 경주마인데도 우승한 점을 본다면 잔디 경주마가 충분히 달릴 만한 주로다. 그러나 진영에서는 거리 적성과 주로 적성을 모두 고려해 사우디 컵 대신 네옴 터프 컵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룩셈부르크가 다섯 번째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웃을 수 있을까? 늘 말하지만 치열하지만 안전하고 건강하게 경주를 펼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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