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귀리 주민들이 뜻을 모아 마을회관 앞에 건립한 `제주마의 본향-의귀` 표지석
제주도·말산업계 관계자들 “매우 의미 깊은 일” 일색
이왕이면 ‘청마의 해’인 올해 본향에 우뚝 세워졌으면

본지 특별기획취재팀이 지난해 말산업저널 창간 기획특집 ‘馬&人’을 통해 집중 조명했던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金萬鎰)에 대한 재조명이 최근 활기를 띤 가운데 갑오년 ‘청마의 해’ 벽두에 동상 건립이 기념사업회에 의해 추진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최근 제1호 말산업특구로 지정된 제주특별자치도 내 분위기는 환영 일색에 고무되고 있다.
헌마공신에 대한 재조명은 그의 생애를 다룬 소설 출간에 이어 제주특별자치도(도지사 우근민)가 ‘제주마와 헌마공신 김만일의 공적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작년 말 개최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제주특별자치도가 농림축산식품부에 신청한 말산업특구 지정이 확정 공표된 시점에 동상 건립 추진이 가시화하면서 한층 두드러졌다.
김만일은 조선 선조 때부터 광해군, 인조 제위 기간에 걸쳐 수천 필의 말을 군마로 나라에 바친 인물이다. 국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인조 6년(1628년)에 종1품인 숭정대부에 봉해졌고 헌마공신으로 추존됐다.
그는 원나라가 고려 충렬왕 2년(1276년) 때 제주도에 목마장을 설치한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개인으로는 가장 많은 수의 말을 사육했다. 전체 사육 규모가 당시, 제주도내 전체 마목장에서 사육된 말의 절반에 가까운 수천 마리에 달했고, 한때 1만여 마리에 육박했던 적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헌마공신은 임진왜란 때인 선조 27년(1594년)과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3년, 광해군 12년(1620년), 인조 5년(1627년) 등 4차례에 걸쳐 모두 1300마리를 상회하는 군마를 조정에 바친 공로가 반영돼 제수됐다.
그의 후손들은 책임이 막중했던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을 대대로 수행하며 말 사육과 번식, 생산기반 다지기에 헌신, 제주지역 말산업 육성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말산업특구로 지정돼 기대가 한층 높아진 ‘말의 고장’,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마을회관 앞에는 달리는 말을 형상화한 표지석이 하나 서 있다.
조선시대 때 지금의 의귀리에서 태어나 애지중지 사육한 말들을 국가에 헌납, 임금으로부터 ‘숭정대부’(崇政大夫)의 벼슬을 받은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金萬鎰, 1550∼1632))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의미 깊은 표석이다.
표지석에는 ‘濟州馬의 本鄕-衣貴’(제주마의 본향-의귀)란 휘호와 제주에서 나고 자란 헌마공신의 생애와 공적이 함축된 줄거리가 새겨져 있다.
자료에 따르면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림(重臨)으로 정의현(旌義縣) 출신인 김만일[1550년~1632년]은 조선 중기 때, 대규모의 마목장주로서 말에 대한 관심, 특히 말의 번식과 육성에 열정과 노력이 남달랐던 전문가였다.
헌마공신이 사육했던 말은 무려 1만 필에 달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원나라(몽골)가 고려 충렬왕 2년(1276년) 제주도에 목마장을 설치한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민간인으로는 가장 많은 말을 사육했던 장본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대로 부유했던 집안에서 태어나 목축사업에 남다르게 뜻을 두고 육마(育馬)사업에 공을 들여 해를 거듭할수록 결실을 키우고 자신의 마목장을 번창시켰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마(戰馬)가 가뜩이나 부족했던 실정에서 국영 마목장 대부분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참담한 실정에서 심화했던 국난 타개와 극복을 위해 자신의 사둔마(私屯馬) 500여 필을 군마로 기꺼이 헌납함으로써 반전의 계기를 제공하는 공로를 세웠고, 광해군과 인조 제위 때에도 조정이 요청하면 망설임 없이 사둔마들을 내놓았다고 한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많은 말을 아낌없이 헌납한 헌마공신의 우국충정과 공적이 얼마나 깊고, 대단했는가는 조선왕조가 길이 남도록 새기고, 벼슬을 높여 추존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1632년에 타계한 헌마공신의 생애는 후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대대로 이어지게 했다. 그의 문중에 공직인 감목관직이 약 210년 간 대물림되는 동안 많은 후손들이 제주마 육성과 생산에 크게 이바지한 한편 가난한 민초들의 규휼에도 앞장섰다.
손자인 김남헌은 1724년 제주에 극심한 가뭄에서 기인한 기근현상이 극심하게 나타나자 무려 1300석이 넘는 비축미를 풀어 굶주림이 극에 달했던 수많은 백성을 구제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받은 영조 임금이 김남헌의 선행과 ‘나눔정신’을 높이 치하하고 특별히 지은 비단옷 한 벌을 하사했다고 한다.
헌마공신의 삶과 궤적, 유적을 더듬어 보기 위해 작년 6월 의귀리 소재 생가 터, 묘소 등을 답사했을 때 만났던 의귀리 주민들은 본지 기획취재팀원들에게 “우리 마을(의귀) 이름은 영조 임금의 비단옷 하사에서 유래했다”면서 자부심을 나타냈었다.
또 “헌마공신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문화적 접근, 재조명이 그동안 미흡했다”고 입을 모으고, 서운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헌마공신이 제주를 ‘말의 고장’으로 만든 주역 중 주역이었음은 많은 역사적 사실과 자료들이 반증해주고 있다. 여기에 후손들이 소중히 간직하다 대물림해 온 자료 내용과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헌마공신은 말 사육과 번식, 증산, 그리고 축산으로 보국한 축산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라경제와 지역경제, 사회 발전에 헌신한 기업인이었으며, 뛰어난 선각자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의귀리 주민들이 표지석에 각인한 ‘제주마의 본향’에는 헌마공신의 묘역과 묘비가 방문객이 금세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후손들이 대대로 관찰과 관리에 지성을 들이고 심혈을 기울여 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수백 년 간 묘소를 지켜왔던 문인석이 실종돼 후손들이 깊은 충격에 휩싸였고, 하나같이 몸 둘 바를 모르고 망연자실, 고개를 떨궜던 참담한 사건이 발생했었다고 한다.
한 후손은 본지 특별기획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역사적 유물로서 뿐만 아니라 사적 가치가 상당한 것으로 평가됐던 문인석은 돈에 눈이 먼 도굴꾼들에 의해 육지로 반출돼 매도를 거쳐 별장 정원의 조형물로 사용된 과정이 사법당국의 수사로 드러나 충격과 개탄을 금치 못했고 깊은 상처를 입었었다”고 토로했었다.
헌마공신의 생애와 공적은, 숨이 가파르게 차올랐을 옛적에 한라산의 중턱 산간지대를 오르내리며 말을 기르고 보살폈을 예전의 마테우리들에게는 물론 오늘날의 말산업인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하고 가리키는 의미가 심장한 교훈과 귀감, 그 자체라는 평가가 절대적이다.
헌마공신의 동상 건립 추진에 많은 관심과 함께 박차가 가해지고, 재조명 또한 보다 심도 있게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왕이면 ‘청마의 해’인 올해, 주민들이 ‘제주마의 본향’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새긴 의귀 마을에 그의 동상이 우뚝 세워졌으면 좋겠다.

이준영 대기자

작 성 자 : 이용준 cromlee21@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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