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철 대한승마협회장은 이번 사건이 정치적으로 휘말리는 데 부담을 느껴 9일 이사회에서 사퇴 의사를 밝혔다.
정부 체육 개혁 의지 빗대…협회·시도 협회장들 ‘같이 죽자’ 파국
제 할 말 못하는 대한승마협회, 회장·이사진 총 사퇴 결정만

국내 엘리트 승마계의 곪을 대로 곪은 관행 문제가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국회에서 시작된 이번 사건은 정치권과도 얽혀 진실 게임 공방으로 치닫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안민석 의원(경기 오산)은 4월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323차 국회(임시회) 6차 본회의 교육·사회·문화에 대한 대정부 질문에서 조현재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에게 ‘대한승마협회 살생부’ 문제에 대해 질타했다. 안 의원은 “지난해 5월 대한승마협회 살생부가 작성돼 청와대에 전달됐고, 청와대 지시로 체육단체 특감이 추진됐다”며, 살생부 인사들에 대한 사퇴 압력이 있었고,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정윤회 씨의 딸 정 모 선수가 ‘승마 공주’ 특례로 국가 대표에 선발됐다고 주장했다.

또 “이 과정에서 청와대 서미경 문체비서관과 문체부 노태강 체육국장, 과장 등이 8월 말~9월 초 사이에 석연찮은 이유로 경질돼 청와대와 뜻이 맞지 않은 관료들을 쳐 낸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며, “승마계에서는 4월 상주승마대회 이후 대대적으로 진행된 상주경찰서의 대한승마협회 심판진 조사 사건 이후 정 모 선수가 국가대표가 되기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승마계 관계자들의 말을 빌려 전했다.

그러자 문체부와 대한승마협회는 ‘사실 무근’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8일 문체부는 “대한승마협회 살생부 및 일부 시도 승마협회 임원에 관한 문체부의 사퇴압력 행사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문체부 관계자는 “문화부는 지난해 5월 불공정 판정으로 인한 태권도 선수 아버지의 자살 사건을 계기로 체육계 비정상적 관행의 정상화를 위해 지난해 8월부터 12월까지 2099개 체육단체에 대한 특별감사를 실시했다”며, “대한승마협회 및 시도 승마협회에 대한 감사도 이 특별감사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특정인의 사퇴를 위해 감사가 시행된 것이 아니며, 특정인을 표적으로 하는 살생부도 사실무근”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정홍원 국무총리까지 나서 “단순한 의혹 제기에 불과하며 지금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

대한승마협회도 당일 ‘국가대표 선발 논란 사실과 달라’라는 제목의 해명 자료를 통해 정 모 선수 특혜 선발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대한승마협회는 경기력 향상과 국제대회 출전 국가대표 선발을 위한 각각의 엄격한 절차를 두고 있어 특혜 선발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또 정 선수의 KRA한국마사회 마방 사용 및 훈련과 관련해서도 “동계 훈련 기간 동안 선수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자부담으로 개인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마사회의 협조를 얻어 사용을 득했고, 자부담으로 국가대표 누구나 이용 가능한 사항으로 특혜 훈련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사건 이튿날인 4월 9일, 상황은 더 긴박하게 돌아갔다. 대한승마협회 정기 이사회에서 신은철 회장을 비롯해 김효진 실무부회장과 전유헌·손영신 이사 등 한화그룹 계열 임원 4명과 안중호 부회장까지 총사퇴했다. 협회 관계자는 신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의 사퇴 여부에 대해서도 함구했지만, 본지 말산업저널은 다른 경로를 통해 신은철 회장의 사퇴 발언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최근 김승연 그룹 회장의 신변 문제 등으로 사회적 문제가 된 한화그룹 계열 임원이기에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 데에 부담을 느낀 신 회장은 이사회 말미의 신상 발언에서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상생 정신 없고 정상화커녕 진실게임 공방…상처만 깊어
인천아시안게임·국제 승마대회 등 앞두고 선수들만 긴장

협회 주요 임원진이 총 사퇴했고 각종 의혹에 대해 정부까지 나서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진실 공방은 끝나지 않았다. 처음 문제를 제기한 안민석 의원은 4월 9일 오전 11시 국회 본청 정론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와 협회 측 주장을 반박했다.

김기오 강원승마협회장, 박종서 전(前) 전북승마협회장, 김의종 대한승마협회 이사 등과 함께 자리한 안민석 의원은 긴급 기자회견에서 “오늘 외압 폭로 기자회견을 자청하신 분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승마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분들이지만 돌아온 건 영예가 아니라 협박성 사퇴 종용 압력”이라며, “대한승마협회를 둘러싸고 전개된 ‘검은 손’의 탈·불법적 전횡 등 각종 특혜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으나 정부 측에서 ‘사실 무근’이라고 발뺌, 국민에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를 가지게 됐다”고 했다.

특히 이번 사건에 대해 “대통령의 최측근인 정윤회 씨가 개입돼 사적 채널에 의한 비정상적 통치 행위에서 비롯된 사건이라는 특징이 있음을 파악했다”며 대통령 주변 인사가 부당하게 권력을 악용해 특정 경기 단체를 망가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 의원은 우선 정홍원 총리의 답변에 대해 살생부와 녹취록 등 명확한 근거가 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선수 개인을 위해 마방과 훈련장을 전용한 전례가 없었던 점 등을 언급하며 정 총리의 해명이 매우 부족하고 높은 권력이 개입된 명백한 특혜라고 재주장했다.

또 문체부의 ‘사실 무근’ 반박에 대해서도 박원오 전 협회 전무이사가 4일 안민석 의원실을 찾아 문체부 과장의 요구에 따라 서성호 당시 협회 전무이사가 협회의 문제점을 정리한 문건을 요구한 일명 ‘살생부’의 작성 경위와 과정에 대해 해명을 하고 갔다는 점, 사퇴 종용을 한 공무원과 대한체육회 관계자들이 청와대 지시에 따라 예산을 삭감한다고 문체부와 대한체육회가 협박한다는 발언을 한 녹취록이 다수 확보돼 있다는 점 등을 언급하며 “비정상적인 권력이 작동하지 않고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했다.

대한승마협회의 주장에 대해서는 “마장마술의 심사 기준 문제, 지난해 6월 편파 판정으로 심판진에 대한 초유의 경찰 조사가 진행된 점, 마사회 소속 선수라 하더라도 개인 소유의 말은 사용하지 못하는 데도 박 대통령의 대표적 낙하산 인사인 현명관 회장이 재임 중인 마사회가 이 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특정 선수에게 마방을 제공한 것은 높은 권력이 개입되지 않으면 주어질 수 없는 명백한 특례”라고 반박했다.

체육계 개혁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김종 문체부2차관은 체육계 비리 감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장에서 시도승마협회가 선수보다 임원이 많고, 회장의 장기 재임 문제, 자녀를 선수로 둔 회장이 선수 선발 과정에서 특혜를 제공한 문제, 가족들이 임원을 하며 사유화하며 친인척 배제 조항을 넣을 수 없다고 반발한 문제 등을 언급하며 기관 경고를 내렸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대한승마협회가 횡령 배임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는 박원오 전 협회 전무이사를 2014 인천아시안게임 총감독으로 추천하려고 해 승마인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는 의 기사, 박근혜 대통령의 오랜 측근인 정윤회 씨가 여전히 박심(朴心)에 영향을 미치며 딸인 정 모 선수의 특혜를 위해 승마계와 협회를 좌지우지한다는 주장을 한 박종서 전(前) 전북협회장과 박화조 전(前) 전남협회부회장의 인터뷰 기사가 발표되는 등 ‘협회 흔들기’가 진행되던 차에 이런 대형 사건이 터진 것이다.

표면상 이번 문제는 정치권과 얽힌 특정인의 특혜나 봐주기 논란에 따른 승마계 일각의 반발로 볼 수 있다. ‘살생부’와 편파 판정 등에 대한 진실 공방도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승마계를 흔들었다는 주장이 아니라 이번 사건을 통해서도 승마계의 자정을 기대할 수 없는 한계가 그대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안민석 의원과 몇몇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대한승마협회 문제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게 승마계의 또 다른 주장이다. 전현직 시도협회장들인 이들과 협회의 갈등은 사실 오래 됐다. 이들이 주장하는 협회와 정치권과 모종의 밀약 의혹만큼이나 시도협회장의 측근 위주 이사회 구성 문제, 엘리트뿐 아니라 생활체육협회장까지 독식하는 문제에 대해 승마계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갈등의 또 다른 핵심은 ‘왜 공정한 경기를 하지 않는가’, ‘엘리트 후학 선수들을 왜 양성하는 데 소홀히 하나’로 집약할 수 있다. 정윤회 씨의 딸 정 모 선수처럼 이번 사건을 주도한 김기오 강릉승마협회장 또한 국가대표 선수를 자녀로 두고 있다. 정 모 선수는 마장마술에서, 김 모 선수는 장애물에서 차세대 엘리트 에이스 선수로 손꼽힌다. 따라서 더 거슬러 올라가 지난해 4월 열린 춘계승마대회에서 자녀들의 판정 문제가 이번 사건의 도화선이 됐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이에 대해 야당은 4월 10일에 이 문제를 두고 국정감사까지 요구하고 있어 향후 대한승마협회와 승마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크다. 특히 신은철 회장의 사퇴로 고(故) 김종희 한화 창업주부터 3대째 이어 온 한화그룹의 승마 후원이 중단됐고, 승마계는 그나마 유일하게 스폰서 역할을 한 한화그룹이라는 대기업이 지원하던 연 10억 원가량의 후원금조차 받지 못하게 됐다.

이번 사건에 대해 대한승마협회 박기범 사무차장은 4월 10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여러 문제가 얽혀 있어 회장님의 사퇴 뿐 아니라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는 단계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직 기자간담회를 할 때는 아니다. 현재 홈페이지를 통해 입장을 발표한 게 전부”라고만 밝혔다.

승마산업계 일각에서는 결국 전현직 시도 협회장의 이권·파벌 싸움과 정부의 체육계 특별감사에 대한 확대 해석, 관행처럼 계속된 알력 다툼으로 집약되는 이번 사건이 결국 엘리트 승마계 전체를 죽이는 자충수가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또 대한승마협회의 매끄럽지 못한 대처를 지적하면서도 협회 운영의 빠른 정상화를 요구하고 있다.

승마계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에 대해 “외국에 비하면 우리 엘리트 승마계는 심판 판정의 관행 문제도 있고 경기 운영 상황도 여러모로 열악한 게 사실이다. 함께 몸담고 있는 승마계 사람들이 협회를 발전하게끔 해야 하는데 이해관계에 따라 매일 싸우기만 하는 모습도 더는 보기 싫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한 관계자는 “협회가 그간 대회 운영의 미숙한 점, 심판 판정 문제 등 한계를 드러내면서도 안주했고, 이를 참다못한 일부 인사들이 이번 사건을 도모한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또 다른 한 인사는 “무엇보다 올해 인천아시안게임과 세계승마선수권대회 등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협회가 파행의 길에 들어서고 지원이 사실상 끊겨 가장 피해를 본 것은 어린 선수들”이라고 지적하며 “하루 빨리 사건이 마무리돼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용준 기자 cromlee21@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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