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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협군의 책과 여행 이야기]
나라와 민족을 위한 숭고한 희생의 정신, 2019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순애 선생님
여성 독립운동가 김순애, 여성애국운동의 선구자를 만나다.
2019. 04. 30 by 권용 전문기자
 

태어나서 처음 대전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예전부터 오고 싶었으나 쉽게 발길이 닿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이곳에 잠들어 있는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잠들어 계시는 공간적 상징의 의미를 넘어, 대한민국의 근간이 되는 성역이나 다름없는 곳이 바로 여기 국립현충원이다.

사실 이렇게 먼길을 달려올 수 있었던 건 2019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순애 선생님을 뵙기 위함이었다. 막상 취재를 하고 글을 쓰려고 하니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솔직히 김순애 선생님에 대한 정보 자체가 내겐 너무 미흡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고백하건데, 이달의 독립운동가 전문필진 활동을 하기 전에는 김순애 선생님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들어보지도 못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역사를 좋아했고, 학창시절 열심히 공부를 하였는데도 내겐 너무 생소한 이름이었다.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더 많은 분들께 김순애 선생님에 대해 알리고자 이렇게 서두에 이야기를 꺼낸다.

 

먼길을 달려 대전 국립현충원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그냥 찾아가면 되겠지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던 국립현충원. 네이버에 안내되어 있는 현충원 전화번호로 안내를 받아 겨우 선생님의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 애국지사 제4묘역 313번, 조국의 애국을 위해 헌신하신 김순애 선생님께서 잠들어 계신 곳이다. 혹시 이 기사를 보는 누군가도 선생님을 뵈러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자세히 위치를 남겨둔다.

 

드디어 마주한 김순애 선생님! 비록 같은 생의 공간에서 뵐 수는 없지만, 묘비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개무량이었다. 매일 말로만 독립운동가분들을 위해 떠들었을 뿐, 이렇게 직접 애국지사분을 뵙기 위해 먼길을 달려와보긴 처음이다. 선생님은 낯선 나를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김순애 선생님뿐만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받쳐 싸우신 분들이 모여계신 곳이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벅차올랐다.

 

김순애 선생님의 업적을 모두 이야기하기에는 짧은 글이지만, 이보다 더 선생님의 삶을 요약하여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독립운동가'라는 말 말고 무슨 표현이 더 필요하겠는가? 역시 2019년 5월, 함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남편 김규식 선생님과 함께 모든 것을 쏟아붇고 지금 이 자리에 누워계신다. 또한 여성독립운동가로서 더 나은 대한민국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선생님의 지난 삶의 흔적을 돌아보면, 남자인 내가 그때로 돌아간다해도 자취를 따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순애 선생님은 신학문을 수학하고 민족계몽을 위해 교육 헌장에서 활동하셨다. 1910년 부산 초량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당시, 일제가 한국 역사 교육을 제한하던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비밀리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셨다.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하셨고 그 곳에서 김규식 선생님을 만나 혼인을 하게 된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소식을 국내에 전하며 독립운동 봉기를 촉발시켰으며, 3·1 운동에도 동참하고자 하셨으나 혹 선생님이 잘못되면 남편 김규식 선생님의 사기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어 재차 중국으로 떠나게 되셨다. 이후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국내 3·1 운동과 같은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던 선생님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감금되었지만, 중국 관원의 호위와 알선으로 상하이로 탈출하게 된다.

상하이로 돌아온 김순애 선생님은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고, 국내외 애국부인회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나아가 적십자 간호원 양성소 개교, 한국독립당 산하 여성 조직 한인여자청년동맹 등을 조직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쉼없이 투쟁을 하게 된다. 후에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에서 선생님이 주석으로 추대가 되고, 한인애국부인회는 국내외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했다.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한국광복군도 위문하며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갔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선생님은 8·15 광복 이후 고국땅을 발게 된다. 1946년 모교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으로 육영사업에 전념하셨고, 1976년 5월 17일, 87세로 생을 마감하신다. 1977년 정부는 김순애 선생님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선생님의 지난 삶과 업적을 모두 나열하자면 밤을 지새워도 모자를 것이다. 부족하지만 짧게나마 선생님의 업적과 공로를 나열해보며 고귀한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비록 일제의 탄압속에서 어렵고 힘든 삶을 보내셨지만, 김순애 선생님을 비롯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신 모든 분들의 삶은 그 어떤 삶보다 고귀하고 소중하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고통으로 신심은 힘들었으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의 정신은 맑고 깊었다. 눈앞의 부귀와 평안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들은 겉으로는 번쩍거렸을지 몰라도 그들의 삶을 고귀하다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있는 김순애 선생님의 묘지. 살아 생전 이토록 발전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상상하셨을까? 비록 나는 선생님처럼 독립운동을 하지도 못했고, 지금 우리 나라와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하고 있지도 않다. 다만 선생님의 묘지 앞에서 "당신의 고귀한 삶의 발자취를 많은 분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어요" 이야기할 수 있었다.

 

묘비에 선생님의 삶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이렇게 많은 애국지사 분들의 묘지를 보니 내가 알지 못했던 분들이 정말 많구나 생각했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공부를 해도 이분들의 이름, 업적을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 열심히 해야겠다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하신 이 자리의 모든 분들을 돌아보며 지금 내 모습이 무척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삶,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그저 그렇게 살아가서는 안되는 아주 귀중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선생님의 묘지를 돌아보고 주변의 많은 애국지사분들의 묘비도 돌아본다.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애국지사분들께 인사 드릴 수 있었다. 그동안 마음으로, 글로만 표현했던 내 진심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있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올라오는 감동의 마음을 숨길 수 없어 눈물이 났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노력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나라 대한민국, 저는 결코 이곳에 잠들어 계시는 모든 분들의 노고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우리 민죽과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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