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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의 음악 통신]

[성용원 음악통신 133] 이 한 권의 책: 음악의 글 8 '음과 말'- 에세이와 강연록

2019. 12. 19 by 성용원 작곡가

이탈리아의 토스카니니와 더불어 20세기 전반부를 대표하는 지휘자로서 알프스산맥을 경계로 이탈리아와 독일의 음악, 문화를 대변한 거장,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aengler, 1886-1954)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54년에 출간된 에세이와 강연록을 모은 <음과 말, 원제: Ton und Wort: Aufsätze und Vorträge 이기숙 옮김> (포노). 그가 서른두 살 때 쓴 '베토벤의 음악'부터 예순여덟 살로 세상을 떠난 해에 집필한 '모든 위대한 것은 단순하다'(자신의 죽음을 직감하였을까? 참으로 한 세상을 통달한 예술가의 서거 전의 유언 같은 메시지다)까지 서른두 편을 직접 뽑아 엮은 책이다. 음악을 좀 더 깊이 읽고 이해하는 통찰의 글들을 모은 음악 전문 출판사 포노가 선보이는 새로운 시리즈 '음악의 글' 여덟 번째 주인공인 푸르트뱅글러......

음악 전문 출판사 포노가 선보이는 새로운 시리즈 '음악의 글'의 여덟 번째 주인공인 푸르트뱅글러......

이 책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점들이 특히나 심금을 울렸다.

첫째, 시공간을 초월한 음악인의 지치지 않은 음악 사랑과 열정

지금이나 푸르트뱅글러의 20세기 전반기의 독일이나 인식과 자세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인 문화예술에 대한 무지와 불통은 마찬가지인 거 같다. 푸르트뱅글러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우월하다고 믿는 독일 음악, 정신, 문화에 대한 넘치는 자부심으로 하이든, 베토벤, 바그너, 브람스 등의 불세출의 거장들의 진가를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바그너와 브루크너 음악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에 맞서 싸우며 그러지 않다고 강변하고 역설한다. 또한 힌데미트로 이어지는 독일의 현대음악(푸르트뱅글러 생존 시의 최신)을 전파하기 위해 전도사 역할을 한다. 당연하다. 푸르트뱅글러는 독일인이기 때문이다. 푸르트뱅글러의 주장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매번 강조했듯이 일관적이다. 음악을 음악 자체로 여기고 그 가치를 인정해주고 음악이 주는 위대한 힘과 감동에 빠지라고... 열정은 나이가 들었다고 절대 식지 않는다. 평생의 과업이자 사명으로 가슴속 깊은 곳부터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열정의 횃불이다. 음악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머리로 이해하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체험하라고 하며 고정된 상태가 아닌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로서 음악 작품 자체에 몰입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어찌 이리 낱말 하나 안 바뀌고 푸르트벵글러의 8-90년 전의 열변과 2019년 대한민국에서 외치는 필자의 포효와 이리 똑같은지...... 푸르트뱅글러의 음악을 사랑하고 전달하려는 마음이 너무나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둘째, 변치 않던 음악의 위기에 맞선 음악인의 치열한 방어와 투쟁

몇 개의 단어만 대체하면 1919년과 2019년이 세태가 별로 다르지 않음에 읽으면서 깜짝 놀라게 된다. 기술의 발달은 음악 감상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저장해서 영구적으로 소장할 수 있다. 더군다나 AI는 큐레이터의 기능까지 담당하고 감상자의 취향과 기호를 집계해서 그때그때 맞춤형 DJ처럼 척척 음악을 들여 내놓고 이제 곡 제목을 알 필요도 없고 음악을 듣기 위한 수고와 공부는 아예 기울일 필요가 없어졌다. 편의는 그만큼 가치의 하락과 연결되어 음악은 이제 돈 주고 듣는 거라는 인식이 거의 사라져버려 일상생활의 소리로까지 전락하고 영상이 없는, 보지 않고 듣기만 하는 음악 시장은 이제 거의 소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 스트리밍과 AI를 푸르트뱅글러 시대의 음반과 라디오로 단어만 대체한다면 그때 사람들이 느낀 음악 감상의 위기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나 푸르트뱅글러같이 연주의 현장성을 강조하며 실연이야말로 음악의 '실존'이라 여기는 사람이 마주친 현실이 얼마나 난감하고 개탄스러웠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그의 글에서 시대와 치열하게 맞서면서 '실존'을 제대로 인식시키고 음악에서 오는 형언할 수 없는 무아의 감동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친 예술가의 신념과 혼을 느낄 수 있어 비장하기까지 하다.

또한 예술가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기개 있는 행동과 자세는 귀감이 된다. 문화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거부했으며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웠고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세상의 무례와 무지에 맞서 자존심을 지켜나갔다. 히틀러 체제 아래에서 핍박받던 힌데미트를 비롯한 동료 음악가들을 위한 구명을 호소하는 장면에서 불과 몇 년 전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스캔들이 떠올랐다. 정치 노선과 이념에 따라 갈리는 문화예술에 대한 평가와 예술에 대한 정치 & 자본 권력의 개입에 맞서 베를린 필 지휘자 직에서 물러나면서까지 싸운 예술가적 양심, 과연 우리 클래식 음악계는 이런 예술가가 있었는가?

20세기의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인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20세기의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인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1930년대도 관객이 연주회장을 찾지 않는다고 탄식하며 음악계의 쇠퇴와 관객 절감, 더 나아가 음악 실존의 위기에 고민하는 모습이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부럽기도 하다. 아마 또 지금부터 또 시간이 흘러 22세기가 되면 그때는 현재의 음악계 상황을 걱정하는 우리의 모습이 부러울 수도 있을 테니까... 22세기가 되면 클래식 음악은 박물관이나 그저 교과서의 한 칸만 차지하고 있는 유물이 될지 아님 고전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푸르트뱅글러가 표현한 것처럼 '생물'로서 끊임없이 변하고 소수지만 그 가치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는 이들과 같이 호흡하게 될지 그건 오롯이 지금의 음악인들의 과제이자 몫이다. 지금의 고민과 이 시대의 음악인이라면 고뇌해야 하는 문제점들에 대해 선각자들도 마음 아파하고 고뇌하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음악을 지탱시키려는 자세와 헌신이 있었다. 즉 음악, 고결한 클래식 음악은 이런 예술이다. 위기의 산물이며 값없이 얻어진 인류 문화재산이 아니었으며 그래서 아무나 듣고 누리는 일상의 기성품이 아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쿠퍼의 대사로 푸르트뱅글러의 저서 <음과 말> 서평을 맺을까 한다.

우리는 답을 찾을 거야.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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