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식 감독의 ‘나와 함께한 녀석들’(3)

백마구락부 일반 회원
언제쯤이나 녀석을 한번 기승할 수 있으려나 하며 지내던 어느 날 큰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우리가 연습하던 백마구락부는 육성 선수 말고도 많은 일반 회원들도 승마를 즐겼다. 당시 일반회원으로 승마를 할 정도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이었다. 일반 회원 중 한 분이 오랜만에 나와 외승을 나가겠다고 했다. 교관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셨고, 그 회원에게 마장에서 제일 믿을 만한 녀석인 ‘탄’을 배정했다. 승마 실력이 상당한 수준급에 있는 일반 회원이었지만 외승은 위험하기 때문에 혹시나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녀석을 배정하셨던 것 같다. 마장에서 약 30분 정도 운동을 하고 외승을 나갔다.

외승 나갔다 다쳐 온 ‘탄’
백마구락부 위에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도로는 비포장 상태로 시외버스는 40분 간격으로 왕복하며 일반 차량은 보기가 드물었다. 그리고 마을 위에는 군부대가 있었다. 종종 군부대 차량이 이동하곤 했다. 비포장도로에서 군부대 트럭이 지나가면 소리도 요란하지만 먼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도로 가장자리를 이용해 외승을 하곤 했다. 그때가 12월 초순경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외승을 나가고 난 뒤에 얼마 되지 않아 그 회원은 ‘탄’을 끌고 다시 돌아왔다. 간신히 끌려오는 ‘탄’의 왼쪽 엉덩이가 기역자로 찢어졌고 그 밑으로는 피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다. 어떻게 사고가 났느냐고 물어볼 경황도 없이 우리는 마방 복도에 설치돼있는 보정 틀로 말을 이동시켰다. 잠시 후에 교관님께서 수술 도구를 챙겨와 봉합 수술을 하기 시작했다. 알코올을 세숫대야에 가득하게 붓고 그 안에 수술 도구를 넣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썼다. 처음 내게는 코틀이를 잡고 있는 임무가 주어졌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코틀이를 흔들어서 틀어진 코의 고통으로 수술하고 있는 부위에 고통을 분산시키는 역할이었다. 그때는 수의사도 아주 드물었고 마필 운송 차량도 없었기 때문에 마필이 부상을 당하면 대부분 승마장에서 스스로 알아서 해야만 했다. 지금은 조금만 아파도 왕진 가능한 수의사도 있고 또 심각한 부상일 경우 마필을 옮겨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아무튼 녀석은 수술하는 동안 용케도 잘 참았다. 난 코틀이 잡는 일에서 소독약 들고 있는 일로 교대됐다. 교관님이 요구하는 물건을 건네주고 사용한 용구는 다시 깨끗이 소독용 알코올로 소독하는 일이었다. 당시가 12월 초순이라 손가락이 끊어질 듯 시렸지만 고통을 호소하는 녀석을 보노라면 그것마저도 내게는 호사였다. 아무튼 교관님의 서두를 수밖에 없는 수술은 약 4시간가량이 지나서야 끝났다. 교관님도 전문가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모두 힘든 수술에 지쳐있었고 녀석도 많이 힘들어 했다. 우리는 수술이 잘되었길 바랄 뿐이었다. 수술 후에도 약물 주사와 상처 부위 소독은 정성을 다했다. 그런 정성 덕분인지 녀석도 잃었던 생기가 다시 돌아오는 듯했다.

‘탄’과 아쉬운 이별
그런데 3월에 접어들자 ‘탄’은 밥도 덜 먹고 상태가 악화되어갔다. 미처 다 아물지 못한 상처 부위가 부어오르는 듯하더니 곧 고름이 흘러내렸다. 아마도 겨우내 추운 날씨가 상처부위의 부작용을 억제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상처 부위가 기역자로 찢어졌기 때문에 상처 안의 불순물이 밖으로 배출되지 못하고 상처가 악화됐던 거다. 어느 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승마장에 가보니 녀석의 마방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녀석의 행방을 관리인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체념하듯 “에이, 그놈 고생만 하다가 갔어! 회복돼서 더 같이 지냈으면 했는데.... 교관님께는 물어보지 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녀석은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는 녀석이 떠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녀석의 얘기를 교관님께 물어볼 수 있었다. 아마도 말들은 인간 세상이 아닌 환상의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동물일지도 모른다. 말처럼 아름다운 동물이 우리와 같은 세상에 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 꺼리던 ‘진건’
백마구락부가 있었던 마을의 이름은 진건면 용정리였다. 그래서였는지 새로 우리 승마장에 온 말 중에 ‘진건’이란 이름을 가진 말이 있었다. 이곳에 오면서 새롭게 받은 이름이었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정확한 기억은 없다. 녀석 역시 경주 퇴역마였다. 모색은 Chestnut이었고 경주 퇴역마 치고는 골격이 상당히 굵은 말이었다. 당시 같이 훈련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정말로 힘든 훈련이 매일매일 주어졌다. 혈기왕성한 중학교 3학년 때라 잠시도 몸을 가만히 두면 몸이 근질근질하던 시기였다. 학교를 마치고 승마장에 가면 재빨리 승마복으로 갈아입고 교관님께 훈련할 마필을 배정받는다. 이때가 가장 긴장이 되는 시간이다. 우리 모두는 훈련에 가장 선호하는 마필이 있었고, 반면에 가장 좋아하지 않은 마필도 있었다. 가장 좋아하지 않는 마필은 바로 ‘진건’ 녀석이었다.

안장도 없는 혹독한 훈련
그 시기에 우리는 매일 안장 없이 기승하는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안장을 얹고 하는 훈련과 동일하거나 더 심한 강도로 진행됐다. 먼저 평보를 약 20분가량 한다. 이때 말 등에 닿는 엉덩이 허벅지 안쪽이 약간 땀이 차며 밀려 들어온 털이 피부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사타구니 안쪽이 저려오기 시작할 때쯤이면 교관님의 “전체 속보로 가”란 구호와 함께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다. 평보 할 때 불편했던 것들이 해소되는 순간이지만 다른 고통이 찾아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허벅지 안쪽 근육이 끊어질 듯 아파온다. 균형을 잠시라도 잡지 못하면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거리기 일쑤다. 숨은 목까지 차오르고 온몸은 금방 땀으로 범벅이 되고 만다. 이쯤 되면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이 들려온다. 어떤 아이는 낙마를 하는 경우도 생겼다. 낙마라도 하는 날이면 ‘맨 등에 뛰어 올라타기 10회’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좌속보가 끝나면 다음은 경속보다. 맨 등 위에서 경속보. 이때 숨소리는 더욱 가빠지고 가끔씩 들리던 신음은 서로 공공연하게 인정하듯 연일 터져 나오고 만다. 얼굴은 하나같이 곧 죽을 듯 인상을 쓰며 동시에 버텨내려고 이를 악무는 모습, 교관님에게 제발 살려달라는 표정 등 모든 군상들이 매 순간 바뀌며 훈련은 최악의 상태로 흘러간다. 그 끝은 전경자세이다. 이제부터 시끄러운 신음 아니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온다. 교관님은 너무 시끄럽다며(실제는 그리 시끄럽지 않았으리라) 조용히 하라고 한다. 이어 “전체 제자리에 서” “하마” “뛰어 오르내리기 10회” 처음에는 체력이 비축돼있어 힘이 들어도 제법 할 수 있지만 다리에 힘이 빠지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에서는 도저히 못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개인별로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끝내는 한 사람 낙오자 없이 모든 과정을 수행한다.

다시 시작되는 전경자세. 이제는 거의 포기 상태가 되는가 싶으면 구원의 소리가 들려온다. “전체 구보로 가” 이제부터 잠시 동안은 휴식 아닌 휴식 시간이 된다. 구보가 내 몸을 잠시라도 말 등에서 부드럽게 올려주는 게 한없이 고맙고 또 고맙기만 하다. ‘아! 하늘을 나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안장 없이 하는 구보가 쉽지만은 않지만 그때에는 더없이 편했던 것 같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곧이어 들려오는 교관님의 목소리 “전체 전경자세로 가” 다시 신음은 커져만 가고 허리와 등은 구부러져 흡사 새우등이 된다. 간신히 유지해오던 발뒤꿈치는 위로 올라가고 안쪽 허벅지에는 불청객인 쥐(근육 경련)이란 놈이 찾아온다. 하지만 계속 움직이는 말 덕분(?)에 쥐는 자리 잡지 못하고 이내 사라진다. 이제 체력이 거의 바닥나고 정신이 혼미해져올 시간이 되면 다시 “좌속보로 가”란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는 운동이 거의 다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도 행여나 집중하지 못하면 구보에서 속보로 떨어질 때 균형을 잃고 낙마를 하고 만다. 속보로 자세가 안정이 될 때까지 조심하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이런 지옥과 같은 훈련이 끝나면 사타구니에서는 피가 나고 짓물러 샤워할 때는 비명이 절로 난다.



‘진건’을 꺼리던 이유
‘진건’ 녀석과 훈련을 함께 하는 날은 평소보다 몇 배 이상 훈련하는 느낌이 든다. 녀석의 속보 반동은 하늘을 찌를 듯하고 등선마루는 태백산맥 줄기와 같이 험준해 뭇사람들의 등반을 쉽게 허용치 않는다. 앞 다리의 걸음은 군 의장대의 절도 있는 걸음을 옮겨다 놓은 듯했다. ‘진건’ 녀석은 훈련이 있는 날이면 우리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꿋꿋이 우리와 함께 애증의 시간을 보낸 추억의 말이다. 녀석의 의기 때문에 우리의 실력은 일취월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아시안 게임 등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훈련할 때 일부러 녀석처럼 속보의 걸음이 힘차고 박력(?)이 넘치는 녀석들을 찾아 연습하곤 한다.


▲당시는 수의사도 아주 드물었고 마필 운송 차량도 없었기 때문에 마필이 부상을 당하면 대부분 승마장에서 스스로 알아서 해야만 했다. 지금은 조금만 아파도 왕진 가능한 수의사도 있고 또 심각한 부상일 경우 마필을 옮겨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1981년 첫 번째 입상 당시 모습.
▲‘진건’ 녀석은 훈련이 있는 날이면 우리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녀석의 의기 때문에 우리의 실력은 일취월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981년 뚝섬승마장.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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