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환 피터팬승마캠프 대표의 ‘어느 멋진 날’

▲김경환 대표는 마흔셋에 교사를 그만두고 전주기전대학 마사과에 입학했다. 생활체육지도사와 재활승마지도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대중에게 진솔한 승마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국마사회는 올해 ‘유소년승마사례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공모 결과 최우수상부터 장려상까지 총 19편이 선정됐습니다. 은 19편을 연재합니다. 그 열세 번째 순서로 우수상을 받은 김경환 피터팬승마캠프 대표의 ‘어느 멋진 날’을 소개합니다. 수상자들에게 축하와 함께 한국마사회 말산업진흥처에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 편집자 주

“말 위에서 조금씩 여유를 찾은 아이
말이 주는 온기, 리듬, 움직임에 오감이 깨어나다.
아이는 정서적 교감으로 형성된 말과의 관계로
자신의 울타리에서 끌어내다.”

얼마 전, 승마장으로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제주도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다고 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나의 기사를 보고 용기를 얻게 된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전주로 이사해 기전대학 마사과에 올해 입학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새로운 길을 보여준 사람을 직접 만나고 싶었다며 그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날 생전 처음 만난 그 사람의 삶이, 나의 지난 시간과 닮은 궤적을 그리기 시작한 것을 보고 기분이 이상했지만 결코 순탄하지 않을 그의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내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우리는 늘 꿈의 간절함과 현실의 무게를 저울질하고,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절충적 대안을 모색하면서 각자의 삶을 꾸려 나간다. 영리하고 합리적인 선택은 순탄한 길 위로 우리를 이끌지만, 어느 순간 무모한 열정이 모든 것을 바꿔 놓기도 한다.

나의 이야기도 그랬다. 어느 날 전주 승마장에서 처음 말 등에 오르기 전까지, 내 생활은 큰 물결을 모르고 평온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가슴 뛰는 일과 마주친 나이는 이미 마흔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고 모두가 철없다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주저할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흔셋이란 나이에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내던지고 전주기전대학 마사과에 입학했다. 갓 스물이 된 어린 학생들과 똑같이 마방 치우는 일부터 말을 돌보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말산업의 전망에 고무된 정부가 승마 육성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였고 생활체육지도사와 함께 지방 소도시에서는 흔하지 않은 재활승마지도사 자격까지 취득했다.


▲김경환 대표는 마흔셋에 교사를 그만두고 전주기전대학 마사과에 입학했다. 생활체육지도사와 재활승마지도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그러나 승마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했던 꿈이 현실에서 구체화하기까지 짧지 않은 혼미의 시기를 지나야 했다. 이곳 군산이라는 소도시는 승마에 대한 인식도 여건도 모두 낙후한 곳이다. 그러던 중 졸업을 앞둔 시점에 승마장과 펜션, 경주마 번식을 겸하고 있는 한 승마캠프에서 교관으로 잠시 일하게 됐다. 승마장 경영과 더불어 말 목장 번식 등을 함께 경험할 좋은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삶이란 항상 의도했던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 그곳에서, 뜻밖에도 유소년 승마교육의 전망을 보게 된 것이다. 승마사업을 생각하면서 병행할 수 없다고 여겼던 선생님의 꿈을 나는 다시 건져냈다.

승마는 유럽의 경우 청소년에게 필수적인 심신 단련 교육이고 의료보험 혜택이 주어지는 최상의 치료 수단이라는 것이 보편적 인식으로 자리 잡은 국민적인 스포츠다. 한창 성장기에 있으면서도 교육선진국 아이들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스포츠 권리를 박탈당한 채 대학입시라는 한 가지 목표 앞에 아이들을 줄 세우는 공교육과 숨 막히도록 치열한 사교육으로 인해 생기를 잃어가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승마라는 최상의 체험 기회가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곳 군산에는 정식 인가를 받은 승마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승마의 교육적 효용에 어렴풋이나마 눈뜬 정부가 이미 책정해 놓은 귀한 예산이 쓰일만한 합법적인 교육장이 부재한 탓에 이 도시 우리 아이들이 이런 천금 같은 기회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지나고 마는 것이다.

정식 승마장의 개원은 운 좋게 정부의 지원을 받더라도 개인적인 자금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불투명한 수익 구조와 필요 자금 때문에 사람들은 내게 눈먼 열정에 휘둘린 무모한 선택이라고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복잡한 준비와 숱한 시행착오와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난관을 지나 승마장을 개원하기까지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표준 규격을 갖춘 군산 최초 공인승마장이었다.

그렇게 군산에서 최초로 학생 승마 체험이 시작됐다. 책정된 인원의 세배에 가까운 신청자가 몰렸고 주로 초등학생들이 선발됐다. 농림부와 지자체의 지원 덕에 적은 비용으로 삼백 명 가까운 학생들이 승마 체험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미약한 출발이었지만 그간의 힘든 과정들을 잊게 해준 것은 사업자로서가 아닌 선생님으로서의 뿌듯함이었다. 성장기 아이들에게 승마는 측대 보행을 통해 기승자의 척추 기립근을 단련시켜 바른 자세를 유지하게 해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신체적인 장점과 더불어 살아있는 동물과의 교감을 통한 자기 주도력의 인식이라는 정신적 효과를 체험할 멋진 기회이기 때문이다.


▲군산에서 표준 규격을 갖춘 최초 공인승마장을 설립했다. 농림부와 지자체의 지원 덕에 적은 비용으로 삼백 명 가까운 학생들이 승마 체험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수익 창출이라는 개념은 자연히 순위가 밀려났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라 일반 회원을 교육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교관과 보조자가 부족하지 않아야 했고 말도 여러 마리 더 필요했다. 아이들을 태우는 말의 상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넉넉한 먹이와 쾌적한 마방, 지나치게 힘이 축적돼 위험한 상황을 만드는 것을 방지하는 대책까지 빈틈이 없어야 했다. 추가로 땅을 임대해 말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방목장을 만들어 정해진 규격 이상의 시설을 갖췄다.

팽팽한 긴장 상태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마장에서 한 명씩 이름과 얼굴을 같이 떠올리며 그날의 수업을 돌이켜보고 다음 수업을 계획하며 일지를 작성하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아이들은 크게 두부류였다. 겁이 많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겁이 많은 아이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웠지만 긴장해 기술 습득이 늦고 말과 친해지는 데 오래 걸린다. 겁이 없는 아이는 대범하고 말과 쉽게 친해지는 반면 산만하거나 제멋대로여서 교관에 집중하지 않아 오히려 교관을 긴장시키기도 한다.

승마는 겁 많고 순하지만 제어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동물을 기술적 정신적으로 통제하는 법을 배워 각자 말과의 관계를 독자적으로 형성하게 되는 독특한 체험으로 아이들 모두가 그 효과를 제대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앞섰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관계 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승마를 지도하며 이루어지는 학생과 말과 선생님과의 관계 구도는 승마지도사만이 가질 수 있는 매우 특이한 경험이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간과한 또 하나의 관계가 있었다. 학부모들과의 관계였다.

학교 체육 선생님은 학부모와 직접 대면하는 일이 거의 없고 학생 개개인과의 교류도 많지 않은 단체 수업의 성격이 강했다. 승마는 한 번에 여러 명이 참여해도 개인적인 교육이 많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매시간 학부모를 대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가끔 엉뚱하고 억지스러운 학부모의 요구에 부딪히게 되면 그 상황을 부드럽게 해결하지 못했다.

선생님으로서의 권위의식과 자식의 일에는 합리와 비합리를 구분하지 않으려는 대한민국 엄마들의 성향이 마찰을 일으키는 일이 생겼다. 원칙과 소신이 중요하다는 내 신조를 굽히지 않았고 한번 세워 놓은 규정을 침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만족도와는 무관하게 학부모들 사이에 불만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내게 이렇게 충고했다. “승마장은 교육장이 아니야. 서비스이고 영업이야.”

사업은 콘셉트가 출발이다. 사업자의 마인드는 배의 방향타이고 비행기의 기수인 것이다. 애초 ‘나의 콘셉트가 무엇이었나’ 한동안 회의에 빠졌다. 수익성보다는 먼저 교육이라는 개념에 충실해 이 지역 사회에서 승마의 교육적 효과와 훌륭한 스포츠로의 승마에 대한 인식을 깨우는 것이 나의 견고한 목표였다.

답은 늘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학부모와의 사소한 신경전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기심에 승마 교육의 체험을 공유하고 싶은 학부형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이 전달되면 아예 신청을 포기했고, 10회 체험이 끝나도 계속해서 말을 타고 싶은 아이들의 간절함도 엄마의 선호에 따라 무시되는 경우도 생겼다.

아이들의 눈빛에는 아쉬움과 원망이 정직하게 담겨있었고 나는 다시 오지 못하게 된 아이들이 마음에 밟혔다. 미처 계산하지 못한 부수적 피해가 아이들에게 끼쳤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원칙과 소신은 중요하다. 그러나 좀 더 마음을 열고 학부모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사소한 원칙에 얽매이기보다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해 보자.

심리학에서는 말한다. 세상에서 바꾸기 가장 힘든 것이 관점이라고. 관점을 달리 해보니 나는 선생님이기 전에 부모이기도 했다. 자식 일 앞에 감정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엄마들의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는 다짐을 일단 머릿속에 새겼다. “나의 원칙” 혹은 “규정”만을 내세워 엄마들의 요구 앞머리를 잘라버리던 나의 태도를 고쳐야만 했다. 마장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것보다 몇 배 어려운 일이었지만 한고비를 참고 상대방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할 수 있게 기다리면 어느 순간 상대방 스스로가 자기 생각과 감정을 정돈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경청의 힘은 자기계발서에나 나오는 상투적인 구호만은 아니었다. 인내는 보상받았고 엄마들과의 소통은 점차 수월해졌다.

승마체험 학생 수가 축적되고 자연스럽게 홍보가 이뤄지고 있던 어느 날 승마의 교육적 효과에 대해 남다른 기대를 한 학생과 만나게 됐다.

아빠의 손에 이끌려 온 아이는 또래보다 언어가 늦고 운동 능력도 떨어졌다. 일곱 달 만에 서둘러 세상에 나온 미숙아였다고 했다. 아빠의 머릿속은 아이에 대한 애틋한 근심으로 어지러워 보였고 내 머릿속은 아빠의 기대로 복잡해졌다. 승마가 심신 치료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은 이론을 통해 잘 알고 있지만 실제 과제가 내 앞에 현실로 주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아빠는 교육의 효과 위에 치유의 효과까지 기대하고 있었다.

의사소통 능력이 다소 떨어지던 아이는 말을 매우 무서워했고 승마장에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서둘게 되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먼저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빠에게도 같은 것을 주문했다. 정서적으로 미숙한 아이가 관계 형성이 더 쉽지 않은 것은 아이와 인내심 있게 소통하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을 했던 십 년의 기간에도 그랬지만 그간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이야기 하는 것에 훨씬 익숙해진 나는 일단 아이와 많이 대화를 시도했다. 반응이 활발하지 않은 아이와의 대화는 쉽지가 않다. 일방적인 대화는 금방 지치고 싫증이 나게 되지만 내게는 부모들과의 대결 끝에 터득한 인내심이 있었다.

말 위에 앉아 겁에 질려 잔뜩 굳어있는 아이에게 계속 말을 걸고 대답을 조금씩 유도해 가면서 긴장을 풀어주려고 했다. 한동안 성과는 눈에 보이지 않았고 보상 없는 지루한 날들이 지나갔지만 아빠도 나도 아이도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말 위에서 조금씩 여유를 찾은 아이는 점차 말이 주는 온기와 리듬과 큰 움직임에 의해 오감이 깨어나기 시작한 듯 보였다. 언어적 소통보다 더 깊은 차원의 정서적 교감으로 형성되는 말과의 관계는 언어적 한계로 인해 갇히게 된 자신만의 좁은 울타리에서 아이를 조금씩 끌어냈다. 말이라는 이 기특하고 신비한 동물은 어쩌면 사람보다 더 민감하게 아이들의 투명한 영혼에 감응하는 것 같다.

아이는 자기표현이 많이 늘었고 표정이 밝아졌고 아빠의 얼굴도 환해졌다. 고등학교 진학이 고민이던 아빠는 아이의 진로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기뻐했다. 마사고 입학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에는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것이 선생님의 책무이지만 한 아이의 앞날에 이렇게 깊이 관여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아이와의 인연보다 책임감이 더 오래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찾아 제공하고 함께 고민 한 끝에 아이는 장수에 있는 마사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다행히 아이는 잘 적응했고 우리는 안도했다.

지금도 기숙사를 나오는 주말이면 마장에 와서 종일 함께 지낸다. 처음 말을 타게 된 곳이라 그런지 아이는 이곳 승마장에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 무엇보다도 승마장에서 가장 편안해 보이는 아이의 표정에서 나는 나의 선택에 대한 보상을 얻은 듯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승마를 선택했을 때도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보상이었다.

우리 승마장은 올해 전주기전대학과 업무 협약을 준비 중이다. 졸업반 학생 한 명에게 1년간 장학금을 지급하고 방학 중에는 실습의 기회를 주고 졸업 후에는 승마장에 우선 취업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교육을 위한 인력을 미리 확보함과 동시에 지역 승마 산업에의 작은 기여를 통해 우리 승마장도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해당 관련 기관에서 이러한 시스템을 도입하면 이 지역의 승마 교육과 산업에 전략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

결국, 승마장은 사업이 아니라 교육의 장이었다. 삶이란 경험의 학교이고 학생들에게 다양하고 의미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선생님의 진정한 책무일 것이다. 승마라는 이 멋진 스포츠는 아이와 지도사에게, 때로는 그 부모에게까지 정서적인 발전과 치유의 경험을 선사한다. 승마지도사가 되어 학생들을 지도하게 된 것은 내게 이러한 책무의 깊이를 인식하는 계기가 된 근사한 선택이었다.

인생의 어느 고비에서 중대한 선택과 마주해 자신의 꿈의 무게를 확신하게 된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이야기해 줄 것이다. “주저하면 멋진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리고 기원해본다. 나를 찾아와 내 손을 잡았던 그에게도 이런 멋진 일들이 일어나기를!


▲승마장은 사업이 아니라 교육의 장이다. 승마는 아이와 지도사에게, 때로는 그 부모에게까지 정서적인 발전과 치유의 경험을 선사한다.

교정·교열= 박수민 기자 horse_zzang@horse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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