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카드 아닌 국회에서 토론하고 협상하며 입법에 충실해야

삭발’(制饔)은 불교에서 출가정신의 상징이다. 불교의 출가 수행자가 머리를 깎는 것은 첫째, 다른 종교의 출가 수행자와 모습을 다르게 하는 목적이며, 둘째, 세속적 번뇌를 단절함을 의미한다. 체발(剃髮) 또는 낙발(落髮)로도 불리며, 세속적 번뇌의 소산인 일체의 장식(裝飾)을 떨쳐 버린다는 의미에서 낙식(落飾)으로 불리기도 한다. 세속적 번뇌와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결단의 상징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해탈을 위해 정진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조지훈 시인은 시 승무에서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라며, 그 숭고함과 엄숙함, 슬픔의 기운을 삭발의 문화적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그동안 삭발은 사회적 약자들이 더 이상 돌파구가 없는 처절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체 일부를 버림으로써 세상에 대해 그 뜻을 알리는 역할을 해왔다. 대부분 노동현장, 비정규직, 소외된 이들이 사회의 부정부패와 부조리에 맞서 분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 세상에 대해 이를 알리기 위해 끝내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하는 절박한 심정을 담은 엄숙하고 처절한 의식이었다.

이같은 삭발은 정치권에서 '비장함'을 표한하는 것으로 정치적 목적을 가진 투쟁을 의미한다. 이에 삭발 감행은 군사독재정권이나 국정농단 등을 행하는 권위주의 정권의 부당한 탄압과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 해당 정치인의 결기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종종 사용되어 왔다.

 

군사정권의 민주주의 탄압에 맞섰던 정치인들의 삭발저항

정치권에서는 그동안 삭발이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야당 정치인들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강력한 요구를 담은 상징적 의미를 가졌지만, 최근에는 지역현안을 관철하려거나 정당의 주장을 반영하기 위한 행보로 삭발의 의미가 변해왔다. 첫 정치인 삭발은 1987년 당시 신민당 소속이었던 박찬종 전 의원은 김영삼·김대중 양김 대선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며 삭발·단식 투쟁에 나섰고, 단일화에 실패한 박 의원은 이듬해인 1988년 무소속으로 서울에 출마해 당선됐다.

1997년에는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한 김성곤 당시 국민회의 의원이 삭발을, 1998년에는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던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정호선 의원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삭발을 했다. 이후 2004년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한 설훈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 삭발과 단식을 했고, 탄핵 철회와 지도부 퇴진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탈당했다.

이후에는 정당의 요구와 지역 현안을 관철하기 위한 방식으로 삭발식이 열렸다. 20072월 김충환, 신상진, 이군현 의원 등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원내부대표 3인이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하며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삭발을 했다. 이규택 의원도 2007년 자신의 지역구(경기도 이천)에서 하이닉스 공장 증설 불허에 반발해 삭발했다. 2010년에는 세종시 수정안 결사저지를 위해 충청권을 지역구로 둔 자유선진당 소속인 류근찬·이상민·김낙성·임영호·김창수 의원과 현 충남지사인 양승조 당시 민주당 의원이 삭발을 감행하며 여당을 압박했다.

18대 국회에서는 통합진보당 김선동·김재연·오병윤·김미희·이상규 의원 5명이 정부의 정당해산심판 청구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단체로 삭발했지만, 결국 통진당은 해산됐다.

19대 국회 첫 삭발은 박대출 한국당 의원이 시작했다. 박 의원은 올해 4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과 검경수사권 조정 법안인 형사소송법 개정안, 검찰청법 개정안 등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되자 스스로 삭발을 했다. 이후 이장우, 윤영석, 성일종 한국당 의원과 이창수 충남도당위원장이 릴레이 삭발에 돌입했다.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에 반발하는 첫 삭발은 무소속인 이언주 의원이었다. 이 의원은 지난 10일에, 이어 박인숙 한국당 의원은 11일에 삭발을 했다. 그동안 남성 의원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삭발이 시대가 변하면서 여성의원들의 투쟁 수단으로도 사용된 것이다.

 

 

영수회담 요구않고, 최후카드인 삭발 극단적 선택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6일 조국 법무부 장관 파면과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삭발식을 진행하면서 정국에 파문이 일고 있다. 황 대표의 삭발은 지지자들에게는 결집을, 다른 정당은 정치쇼라는 비판을 제기하는 등 정치적 대립이 극명해, 정국은 극단적인 대결 양상을 보일 전망이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6일 조국 법무부 장관 파면과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삭발식을 진행하면서 정국에 파문이 일고 있다. 황 대표의 삭발은 지지자들에게는 결집을, 다른 정당은 정치쇼라는 비판을 제기하는 등 정치적 대립이 극명해, 정국은 극단적인 대결 양상을 보일 전망이다.

 

1야당 대표의 삭발은 처음 있는 일로, 1야당의 대표는 대개 영수회담을 요구하는 단식이나 집회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관철해왔다. 영수회담을 요구하면서 야당 대표는 대통령이라는 국가 지도자급으로 평가받게되고, 자신의 정치적 위상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 대표나 중진의원들은 영수회담과 기자회견, 단식은 할지언정 삭발은 선택하지 않았다. 삭발할 경우 정치의 품격을 낮추고 퇴로가 없다는 점에서 이후 단식과 장외투쟁으로 연결되면서 정치적 선택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이번 황 대표의 삭발은 어떤 정치사회적 의미가 담겨있을까? 황 대표는 이날 오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의 헌정유린 중단과 조국 파면 촉구 삭발식'에서 "문재인 정권의 헌정 유린과 조국의 사법 유린 폭거가 더이상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저의 투쟁에서 결단코 물러서지 않겠다. 지금은 싸우는 길이 이기는 길"이라고 밝혔다.

황 대표는 "1야당의 대표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문 대통령과 이 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문 대통령과 이 정권은 국민들의 고통을 외면했다. 국민의 분노와 저항을 짓밟고 독선과 오만의 폭주를 멈추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범죄자 조국은 자신과 일가의 비리, 그리고 이 정권의 권력형 게이트를 덮기 위해 사법 농단을 서슴지 않았다문 대통령에게 경고한다. 더이상 국민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 조국에게 마지막 통첩을 보낸다.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와라. 내려와서 검찰의 수사를 받으라고 촉구했다.

황 대표는 문재인 정부가 자신과 자유한국당의 일관된 조국 장관 사퇴 요구를 듣지않은 채 장관 임명과 함께 국정에 나서게 하는 모습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한다는 강력한 투쟁기조를 정한 것으로 분석된다. 독실한 기독교 장로인 황 대표는 불교적 삭발행위를 통해 문재인 정부를 퇴로 없이 압박함으로써 조국 장관의 사퇴를 이끌어내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린 것으로 판단된다. 인사청문회를 전후해 전략부재로 조국 장관 낙마에 실패하고, 이후 자유한국당의 정당지지율이 도리어 하락하거나 지지부진한 상황에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초조감과 절박함도 배어 있다.

 

정당들 맹탕 청문회 정치적 무능력, 면피용 정치쇼비판

문제는 이번 삭발투쟁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는가이다. 일단 다른 정당들의 입장은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해 다른 야당들도 이를 정면비판하고 정쟁을 위한 것으로 반길 국민이 없다. 민생을 저버리고 정쟁에만 골몰한 정치쇼라고 질타했다.

민주당 이재정 대변인은 논평에서 "투쟁의 이름을 붙인 삭발은 원래 부조리에 맞서 분투하다 그 뜻을 못다 이룬 사람들이 끝내 선택하는 절박한 심정의 발로다. 그러나 황 대표의 삭발은 그저 정쟁을 위한, 혹은 존재감 확인을 위한 삭발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지금은 장외투쟁과 단식, 삭발로 분열과 혼란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민생과 경제를 챙겨야 할 시점이다.민생을 챙기라는 국민의 쓴소리에 눈과 귀를 닫는 정쟁을 반길 국민은 없다"고 말했다. 같은 당 노웅래 의원도 페이스북을 통해 "정치신인의 구태정치 답습이라니 참으로 갑갑한 노릇"이라며 "아무리 원외 당 대표라지만 틈만 나면 국회 밖에서 헛발질, 도대체 민생법안은 언제 처리하나"라고 지적했고, 정청래 전 의원 역시 페이스북에 "황 대표가 출가 목적은 아닐테고 잠시의 일탈이겠지만, 머리 깎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겠구만"이라며 "그럼 나경원은?"이라고 썼다.

다른 야당들의 비판도 이어졌다. 정의당 김동균 부대변인은 논평에서 "머털도사도 아니고 제1야당 대표가 머리털로 어떤 재주를 부리려는 건지 알 길이 없다""이왕 머리를 깎은 김에 입대 선언이라도 해서 이미지 탈색을 시도해봄이 어떨까"라고 지적했다. 민주평화당 박주현 수석 대변인도 논평에서 "삭발 투쟁은 조국 청문회를 맹탕 청문회로 이끈 정치적 무능력을 면피하기 위한 정치쇼에 불과하다""국회의 역할, 1야당의 역할이 무엇인지 황 대표는 성찰하기 바란다"고 비판했다.

'변화와 희망의 대안정치연대'(대안정치) 김정현 대변인 역시 논평에서 "철 지난 구시대적 패션이고 국민 호응도 없을 것"이라며 "느닷없는 삭발로 정치를 희화화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대안정치 박지원 의원은 페이스북에 "21세기 국민은 구태정치보다는 새로운 정치를 바란다""야당의 가장 강력한 투쟁 장소인 국회에서 조국 사태, 민생경제, 청년, 실업, 외교, 대북 문제 등을 추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제1야당의 모습을 원한다"고 썼다.

 

국정 중단 아닌 국회서 입법하고 일해야 국민 지지

문제는 우리 정치권이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도모해야 할 중대한 시점에 국정과 국회가 사실상 중단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여야 3당 원내대표들은 지난 2일 교섭단체 대표연설(1719), 대정부질문(2326), 국정감사(30내달 19) 등의 일정에 합의했으나, 원내대표 회동에서 자유한국당의 조정안에 대한 합의에 실패함에 따라 17일 예정됐던 교섭단체 대표연설 일정이 사실상 무산됐다. 당 대표가 청와대 앞에서 삭발식까지 진행한 자유한국당이 국회에 복귀해 정상적인 정기국회 운영에 협조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동안 국회는 수시로 보이콧됐고, 자유한국당의 장외집회로 국회 일정이 전면 중단되는 일이 숱하게 발생되면서 입법부는 먹통부라는 국민적 비판과 불신을 받고 있다. 16일 현재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제출된 법안은 21,735, 처리되지 않고 계류된 법안은 15,592건으로 집계됐다. 법안처리율이 20% 후반의 충격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학교성적이라면 F학점, 제적 대상이고 해체해야 할 무능 국회다. 매년 엄청난 세비와 관련된 예산을 소비하고, 무수한 특혜와 혜택을 누리면서도 국회는 아무 일도 하지않은 문 닫은 입법부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국회는 서로 토론하고 협상하면서 법을 만들고,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다양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국회가 멈춰서서는 안된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기 위한 소재부품장비특별법, 경제 활성화를 위한 빅데이터 3(신용정보법, 위치정보법, 개인정보보호법), 유치원 3, 유턴기업 지원법, 금융투자활성화법, 서비스산업발전법, 벤처투자촉진법, 상생형 일자리법(국가균형발전법), 유통산업발전법, 청년기본법, 주택임대차보호법 등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등을 다룰 패스트트랙의 선거법 개정안, 검찰·경찰 수사권 조정 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을 비롯한 제도 개혁과 함께 국민들이 입법을 학수고대하는 무수한 민생법안이 죽어가고 있다.

1야당 대표의 단식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눈길은 일부 극성 지지자를 제외하고는 의아하고 싸늘하다. 황교안 대표와 자유한국당은 당장 국회로 복귀해 입법부의 역할에 충실하고, 토론과 협상을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치철학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삭발에 담긴 숭고하고 절박하며, 세상을 구하기 위한 문화적 상징을 정략적 쇼로 전락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조지훈의 승무를 다시 읽고 음미하며, 대중과 세상을 구하려 했던 석가모니와 스님들, 무수한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과 슬픔을 생각하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일터인 정치현장으로 돌아가고, 국회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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