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아시아경마회의 개최 국제 경마계에 한국 경마 각인

제15회 아시아경마회의(ARC) 회의 모습
■ 노조설립과 변천

마사회 노동조합은 1970년 4월 8일 조합원을 순수 조기단(조교사와 기수협회)만으로 정비해 한국연합노조 서울지역지부 한국마사회 분회를 결성, 조기단노조의 성격으로 출발했다. 노조는 설립신고 후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마사회는 조기단은 상금제도에 의해 운영되므로 고용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체협약체결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마사회와 노조는 대립관계를 지속하게 됐고, 1971년 4월 중순에는 조합원 54명이 진료소(뚝섬경마장 마사과 건물)에서 퇴직금제도의 실시, 임금인상, 위험수당 지급 등을 요구하며 한때 단식농성까지 벌이게 됐다.
마사회의 노조분쟁은 곧 사회문제가 되어 감독기관과 서울지방노동위원회가 중재에 나서게 됐고 마사회와 노조는 1971년 4월 20일 최초의 단체협약을 체결하게 됐다. 그러나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 노조활동에 대한 규제가 강화됐고, 덕마흥업 인수로 마사회 단일체제가 되면서 단체협약의 유효기간이 만료된 1972년 4월 이후 마사회는 노조와의 단체협약 체결을 거부하고 조교사 개개인과 경주마 임대차에 관한 약정(마필위탁관리계약)을 체결했다. 이 때문에 마사회노조는 유명무실한 조직이 됐다.
그러나 마사회는 퇴직 조교사의 퇴직금 지급 진정을 계기로 조기단 종사자와 마사회 간에 근로기준법에 의한 노동계약 관계가 성립된다는 노동청의 유권해석을 받아들여 1979년 7월 16일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퇴직금도 지급하기로 했으며 노사간의제문제를 원만히 협의·해결하기 위해 노사협의회 운영규약도 제정했다.

■ 승마 활성화 지원

일반인에 대한 승마강습이 지속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 것은 1975년부터였다. 승마강습은 승마보급을 위해 무료를 원칙으로 하다가 1991년부터 승마보급의 질적인 내실화와 재정적자 감소를 위해 일반인에 한해 유료강습을 실시하기도 했다.
1962년 개장된 마사공원은 1973년 본회의 관람대 현대화 계획과 더불어 추진된 마사지역 일원화 방침에 따라 뚝섬경마장 서쪽제방 밑으로 이전하면서 시설을 확충해 국제규격의 승마장과 사무실, 마사를 갖췄다. 그 후 마사공원은 1979년 7월 승마공원으로 개칭됐다가 1984년 4월 다시 승마훈련원으로 바뀌고, 1986년 11월 승마훈련원은 국제수준의 현대식 시설과 마장을 갖춘 과천올림픽승마경기장(현 서울경마장)으로 이전했다.
승마훈련원의 과천 이전 후 마사회는 88올림픽대회 승마경기에 대비해 국가대표와 상비군 등의 선수 육성, 국제규모의 승마대회 유치 및 개최 등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으며, 1988년 올림픽승마경기를 성공리에 치루면서 한국승마의 입지를 더욱 튼튼하게 다지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마사회의 86아시안게임 및 88올림픽대회 승마경기장 건설과 승마경기 지원은 승마시설 및 장비의 현대화뿐만 아니라 경기운영, 승마기술, 시설관리능력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어 국내승마의 수준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승마사업은 사업수지면에서 마사공원 개장이래 승마훈련원에 이르도록 적자의 연속이었다. 마사회가 이같이 적자를 감내하면서 승마사업을 계속해 온 것은 승마의 보급 및 마필이용의 지도장려가 적어도 마사회법개정 전까지는 마사회 설립목적을 달서하기 위한 목적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사회의 승마강습 실적을 보면 통계자료가 분명한 1974년부터 1992년까지만 해도 학생 4900여 명과 일반인 3000여 명에게 승마강습을 실시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1983년부터 승마강습 횟수를 증가시켰으며, 1984년부터는 승마보급 활동이 미약한 지방을 대상으로 순회강습도 실시했다. 마사회는 1988년 올림픽 이후 지방승마협의회의 자립기반이 확립됨에 따라 1989년부터 지방승마강습을 중단하고, 수도권 지역의 승마강습 확대에 노력했다.
대상별 승마강습 내용을 보면, 학생승마강습은 계속적으로 증가하다가 88올림픽을 정점으로 둔화추세를 보이고 일반인 승마강습은 매년 확대추세에 있는데, 이는 올림픽 이후 지방 승마협회의 활성화로 학생들이 지역 승마장을 이용함에 따라, 마사회에서 학생승마강습 횟수를 줄이고 일반인승마강습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마사회는 학생이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승마강습 외에 1982년부터 다양한 국적의 국내거주 외국인에 대해 마사회를 홍보하고 국제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외국인 대상 무료승마 강습 및 기승행사를 매년 실시했다. 그러나 외국인 승마행사는 당초 의도와는 달리 미군위주의 승마행사에 그쳐 1991년부터 이 행사를 중단했다.

■ 경주 편성 체계

우리나라에서는 개인마주제가 실시되던 1965년까지 경주계획표에 따라 마주와 조교사가 협의해 출마두표를 함으로써 경주가 편성됐으나 1966년 개인마주제가 폐지되면서 경주의 편성은 경주마의 종류, 능력, 수득상금, 승리횟수 등을 감안해 시행체에서 조정해 편성하는 조정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1970년대 들어 민자유치에 의한 개량마 수입으로 경주마의 능력이 향상되고 경주마 두수가 증가됐다. 1972년 경영체제 단일화 이후 마필평균 보유두수가 매년 9.2% 가량 증가하자 마사회는 재원확보를 위해 짧은 경마일수 동안 매출액을 증대시키고자 1일 경주횟수를 늘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경주마의 지속적인 확충으로 경주당 출주두수 및 연 출주두수는 매년 증가하고 두당 출주두수는 계속 감소했다. 경주당 출주두수의 증가와 두당 출주회수의 감소는 경주의 질을 향상시키고 경마 고객에게 흥미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출주마의 경주능력을 조정하는 수단인 부담중량의 경우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상금은 이전부터 마령 부담중량과 함께 경주마 능력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으나 화폐가치의 지속적인 변화와 상금액수의 현저한 변동에 따라 부담중량의 기준으로 삼기 어렵게 되어 1976년 6월부터 상금별 부담중량을 폐지했다. 우승 경주 부담중량도 우승마에게 부담중량을 부여함으로써 경주마 마다 승리의 고른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시행했으나 1978년에 폐지했다. 마필부담중량의 대상인 기수의 한계체중은 1971년 52kg 이내로 하향조정 됐고, 1972년부터 기수양성소 출신기수가 배출되기 시작하면서 경주시 견습기수와 기성기수간의 경주형평을 고려해 기수의 기승기술과 경험 정도에 따라 중량 감량제를 실시했다. 또 1974년부터는 국내산마의 생산기반 취약에 따른 경주능력을 감안해 내 국산마와 외국산마의 혼합경주시 국산마의 마령중량을 1kg가량 감량해주는 신지별 부담중량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핸디캡 부담중량은 1960년대 이전까지 거의 부과되지 않았으나 1970년대 들어 기록에 의한 등급별 경주편성 후 제한된 경주에 한하여 당해 경주 출주마필에 핸디캡을 부과했다.
1970년대에는 불우이웃 돕기, 수재민 돕기 등 사회공헌자업으로서의 특별경마가 시행되기도 했다. 1975년부터 시행된 특별경마에서 발생한 경마 수익은 사회공익사업 등의 특정목적을 위해 사용됐다.

경마산업의 본격 성장과 뚝섬시대의 폐막

1. 경마의 선진화를 위한 노력

■ 아시아경마회의(ARC) 개최

1980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15회 아시아경마회의(ARC)는 국내 경마사상 초유의 대제전으로서 4년간에 걸친 시설 현대화의 노력으로 국제수준에 발돋움한 한국경마의 성장을 해외에 널리 알림과 동시에 국력의 신장을 과시한 대행사였다.
1976년 제13회 인도회의에서 ARC의 서울 개최가 잠정 결정된 후 시설의 개선 등 다방면으로 대회준비를 해오다가, 1978년 제14회 홍콩회의에서 재확인되면서 대회준비는 1979년부터 본격화됐다. 마사회는 1월 1일부로 ARC개최준비위원회와 시설위원회를 발족시킨데 이어 9월 17일 ARC의 사무국이며 공식기구인 제15회 ARC조직위원회를 출범시켜 준비위원회의 업무를 조직위에 인계했다. 조직위는 회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사무국장에 총무이사, 회계·의전·회의·행사·시설의 각 위원은 부장급으로 했다. 조직위는 시설개선 및 경마시행기기의 현대화 등에 주력하며 대회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제15회 ARC는 1980년 9월 11일부터 16일까지 6일간의 공식일정으로 개막되어 13개 회원국 중 터키를 제외한 12개국 407명(남 290, 여 117)과 미국, 바레인 2개 비회원국 대표 4명이 옵서버로 참가했다.
12일 서울 워커힐호텔 가야금홀에서 거행된 개회식에는 정종택 농수산부 장관과 박영수 서울시장이 참석해 치사와 환영사를 했으며 정부와 국회를 비롯해 학계, 축산계, 체육계, 재계 등 각계 인사 100여 명이 함께 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개회식에 이어 경마, 운영, 투표, 수의생산의 각 분과위원회가 차례로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에서 개최됐으며 폐막일까지 주요 인사의 초청연, 리틀엔젤스 공연, 패션쇼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제15회 회의에서는 △ 제16회 회의는 1982년 1월 태국에서 개최하며 △ 제17회 회의 개최국은 파키스탄으로 잠정 결정하되 파키스탄이 6개월내에 의사표시를 하지 않으면 뉴질랜드가 개최하며 △ 전염병분과위원회 설치문제는 제16회 태국회의에서 결정하기로 의결했다.
이밖에 각 분과위원회에서는 한국의 경마제도에 깊은 관심을 표했고(운영분과), 경마의 판촉활동에 과한 다각적인 의견이 교환됐으며(투표분과), 마필전염병에 관하 ㄴ연구보고와 예방책이 진지하게 토의됐다(수의생산분과).
9월 14일에는 뚝섬 서울경마장에서 국제기수초청경마가 열렸다. 호주,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인도, 태국, 일본의 기수 8명과 한국기수 16명이 기량을 겨루었다. 이날 상전경마는 일본대표단컵경주(제3경주), 홍콩트로피경주(제4경주), 타일랜드트로피경주(제5경주), 한국컵경주(제6경주) 등 4개 레이스가 실시됐으며 모두 500만 원의 상금이 시상됐다.
이날에는 평소 4000여 명 정도였던 입장객이 무려 2만4000여 명에 이르고 매출이 2억 원에 달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ARC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1979년 191억 원이던 매출은 1980년에 257억 원으로 일년 사이에 35% 가까이 상승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큰 성과를 올렸다.

■ 투표관리업무의 전산화 실현

1980년대는 경마고객이 현저히 증가했고, 1일 매출에 있어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때였다. 1일 입장인원과 매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수동발매로는 업무를 감당하기 어려워졌을 뿐아니라 △ 매출의 증대 △ 경마인구의 확산 △ 투표업무의 공정성, 고객의 신뢰성 제고 등 경영개선을 위해 전산화를 적극 검토하게 됐다.
또한 새 경마장을 확보하기 위해 올림픽승마경기장 건설을 추진 중이라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전산화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마사회는 1982년 8월 전산화 단행을 결정하고 총무이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전산화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마사회는 국내 전산기 도입업체들이 제출한 사전제안서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최종적으로 한국상역㈜이 제시한 미국 탠덤(TANDEM)사의 탠덤 논스톱(TANDEM NONSTOP) Ⅱ형 전산기와 오토토트(AUTOTOTE)사의 J-25T형 마권발매기를 도입키로 하고 5년 리스방식으로 150대를 도입했다. 도입장비는 그해 10월까지 도착, 설치를 끝내고 시험가동과 운용교육을 거쳐 1984년 1월 7일 새해 첫 경마일부터 가동했다. 전산화 실시년도인 1984년의 총매출액은 1134억 원으로 전년도 대비 167%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전산화 이후 집계, 환급시간의 단축, 경주횟수증가 등으로 인한 매출증대 효과는 1985년 이후에도 해마다 전년대비 최소한 123% 이상의 고도성장을 지속했다.
1988년 2월에 도입계획을 수립했던 베팅스립(Betting Slip)제도 역시 투표관리업무의 큰 혁신을 가져왔다. 전산화 이후 고객이 마권구매표에 기재한 내용을 종사원이 직접 발매기를 조작해 발매하던 마권발매방식에서, 고객이 기재한 마권구매표를 발매기에 바로 판독시켜 마권을 발매하는 베팅슬립제의 도입은 마권 발매업무 간소화, 종사인력 감축, 마권착오발생 예방에 의한 투표사고 방지 및 창구분쟁 해소 등 다방면에서 효과를 가져 온 발매방식의 큰 발전이었다.
베팅슬립제도는 도입년도 8~9월 2개월 동안 뚝섬경기장에서 17대로 시범운영 됐고, 1989년 9월 1일부터 부분적 시험운영을 거친 후에 본격적으로 확대되어 전면 가동하게 됐다.

■ 장외현대화와 민간장외

1970년대 한마진흥㈜에 의해 운영되던 청량리, 남대문, 영등포 장외발매소가 차례로 폐쇄된 후 한동안 장외부재시대가 계속되다가 1978년 광화실업㈜에 의한 장외발매소가 동대문, 미아리, 영등포에 새로 개장됐다.
그러나 광화실업㈜의 3개 장외매장은 방송문화가 본격적인 컬러TV시대로 접어든 80년대에 들어와서도 흑백영상 중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비의 노후화로 인한 화질, 음질의 불량으로 고객들의 많은 불만을 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웨이브 중계방식은 주파수 통달거리의 제한으로 장외매장의 지역적인 확산에 제약을 받고 있어 경마사업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마사회는 1982년 장외발매소의 매출증대와 고객서비스 개선책의 일환으로 장외 중계화면의 컬러화와 더불어 강남지역을 비롯한 수도권 일원에 장외발매소를 확산하는 것을 골자로 한 장외발매소 현대화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광화실업이 계약기간 연장과 임차료율의 인상을 요구, 갈등을 빚자 광화실업이 독점하고 있는 장외운영조직을 이원화하기로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던 중 국가통신조정위원회에서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무선시설 직영방안을 권장하게 되어 광화실업이 장외발매소의 운영 포기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마사회는 광화실업의 기존장외에 대체될 새로운 장외매장을 반포, 성내, 청량리에 설치키로 방침을 정하고 건물 임대차계약을 체결했다. 이들 3개 장외발매소는 한국전기통신공사에 의해 Point To Point 방식에 의한 TV전송로가 구성되는 동시에 때마침 본회가 본장에 추진 중이던 전산화계획에 따라 마권발매기가 설치되어 1984년 1월 7일부터 컬러TV 중계와 전산화가 동시에 실현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화된 장외발매소로서 개장했다. 이어 5월과 6월 각각 영등포와 마포 장외가 개장함으로써 민간장외는 5개소가 됐다.
중계화면의 컬러화와 발매 환급업무의 전산화가 동시에 실현된 장외발매소는 기대이상으로 매출액 증대효과를 가져옴으로써 장외매출은 1984년도에 총매출액의 35.7%를 차지하게 됐다. 신규장외가 예상외의 성과를 거두자 마사회는 1985년 수용한계점에 이른 뚝섬 본장의 혼잡을 덜어주고 지역적으로 균형 있는 경마발전을 꾀하며 매출증대에도 기여하기 위해 수도권 5개소에 다시 신규장외를 증설하는 장외확산계획을 수립했다. 운영희망자를 모집한 결과 5개 지역에 무려 36명이 신청, 그중 건물이 확보된 4개 지역을 선정해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컬러TV 중계에 의한 민간장외는 모두 9개소가 됐다.
장외의 현대화와 지역 확산에 따라 장외의 이용객과 매출은 급속도로 증가되어 1986년 12월말 기준으로 장외매출은 총매출의 54%인 1035억 원에 이르러 본장매출을 추월, 매출 장외 우위시대를 열었다.

■ 자회사(경마용역주식회사) 설립

장외발매소는 민간 장외업자에 의해 운영되어 몇몇 구조적인 문제점을 야기했다. 장외업자는 마사회와 단기계약관계인 시설주로 공정경마보다는 영리추구가 우선이었기에 건전경마분위기를 저해하는 요소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시정하려는 의지가 없었고, 편의시설 투자를 기피하는 경향이 다분했으나 마사회의 지도감독과 통제가 효과적으로 미치지 못했다. 개선방안으로 먼저 직영방안이 논의됐으나 직영은 마사회의 조직, 인력운영과 투자효율면에서 검토가 더 필요했으며 과천경마장과 제주경마장 건설사업 등으로 비용면에서 장외직영이 벅차 직영과 같은 효과를 내면서 책임경영이 가능한 자회사 설립을 차선책으로 선택하게 됐다. 마사회는 1987년 12월 총무이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자회사설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1988년 2월 29일 과천경마장 대강당에서 94명의 주주가 참가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열고 설립등기를 마쳤다. 경마용역주식회사는 1988년 2월에 마사회 사우회가 관리하던 동대문 장외를 인수해 출범했다가 6월에 용산, 9월에 사당장외를 추가 설치하고 1989년 다시 중화, 뚝섬장외를 신설해 5개 장외로 확장했다. 이때부터 장외발매소는 기존 민간장외 9개소와 자회사 경마용역㈜의 장외발매소로 이원화 관리체제가 됐다.

■ 공정경마 강화

1980년대는 경마고객의 의식수준 향상, 경마사업의 신장 등을 통해 재결업무와 공정관리활동, 약물검사 제도 등이 본격화되면서 공정경마가 강화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발매업무가 전산화되고 컬러TV 장외발매소의 개설, 국민소득의 증대 등으로 경마사업이 급성장하게 되자 재결업무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됐다. 1987년 2월에 재결전담기구로서 경마조정실을 신설했고, 1989년 1월 조정실을 재결실로 확대·개편했다. 마사회는 외국전문가를 초빙해 재결업무의 자문을 받음으로써 재결기능을 강화하고 업무수행인력의 자질향상, 경주감시 실무요령의 습득 등을 도모했다. 또한 마사회는 1980년대 후반부터 매년 재결업무의 향상발전을 위해 해외연수를 실시했다.
경마사업의 현저한 신장은 보다 강화된 공정경마 담당기구 또한 필요로 했다. 공정관리는 1962년 한국마사회법 제정 이후 한국마사회법과 동법시행령에 의거해 실시해 오고 있었다. 마사회는 경마에 관련된 부정·불법행위를 사전에 예방하고 부정경마와 관련있는 제반사건을 조사해 부정경마 관련자를 색출·격리시킴으로써 부정경마를 예방하고 공정경마를 구현하고자 1976년 4월에 업무부내에 안전담당을 신설했다. 종래에 총무과와 경마과에서 경마장내 질서유지 정도로 담당하던 공정관리 업무가 체계화되고 전문화도니 시초이다. 안전담당은 △경주마의 보안에 관한 사항 △경마의 공정확보 및 정보수집에 관한 사항 △공정경마 시행의 감독 및 처벌에 관한 사항을 담당했다. 이후 기구개편에 따라 관장부서를 달리하다가 담당기구를 강화해 1986년부터 경마보안실로 승격시켰다. 경마보안부는 당초 임시직제(1993. 1. 27)로서 차장급을 부장급으로 하고 1차장과 2과 조직으로 강화했으나 정부의 조직증설 및 정원확대 억제책에 따라 문화체육부 승인과정에서 정원내 기구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경마보안부장은 차장급으로 하고 1과 4계로 재조정됐다.
1985영부터 마사회는 경마의 공정관리를 위해 각종 실무위원회를 통한 부정경마방지 활동을 벌여 매분기별 경마관계 부서 과장급 이상 간부를 대상으로 부정경마방지 대책회의와 조기단 요원을 대상으로 하는 공정경마구현 대책회의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다.
1987년 6월부터는 마사지역 은신자 색출 및 외부침입자 조기발견을 위해 경비견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경비견은 경마일 마사지역에 배치되거나 경마장내 야간순찰에 활용됐다.
경주마에 대한 약물투여는 경마시행 이래 계속 금지 되어온 사항이었으나, 검사기기와 기술의 부족으로 오랫동안 마사회에서는 실질적인 약물검사를 실시하지 못하다가 1974년에 와서야 경주 후 재결지정마를 대상으로 박층판을 통한 약물검사기기의 도입과 검사 대상약물의 확대를 추진해 국제적 인정시험 합격 등 약물검사 업무에 큰 발전을 이룩했다.
약물검사 또한 1982년부터 전문인력 확충 및 약물검사 기기의 도입과 검사대상 약물의 확대 등을 추진해 국제적 인정시험 합격 등 큰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1987년 5월부터 7경주 이후에 출주하는 경주마에 대해 사전 약물검사를 실시했으며, 1989년 3월부터는 경주에 출주하는 모든 마필에 대해 1~6경주는 박층판, 7경주 이후에는 정밀분석기기에 의해 사전 약물검사를 실시했다. 이로써 약물투여 된 경주마의 출주를 사전에 예방해 공정경마 시행에 크게 기여하게 된 것이다. 1989년부터는 모든 출주 마필에 대한 경주전 약물검사를 실시했다.



작 성 자 : 이용준 cromlee21@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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