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기수
김동수 기수 프로필
성명 김동수
소속조 37조(심승태)
생년월일 1986/12/23(28세)
데뷔일자 2014/06/05
기승중량 49Kg
통산전적 523전 42승 2위 50회

들어가는 말

10월, 39승으로 한 달을 마무리한 김동수 기수는 11월 경주에서는 번번이 목전에서 우승을 놓치며 아홉수를 겪는 듯 했다. 하지만 11월 3주차인 지난 21,22일 경마에서는 그동안 쌓아왔던 열망을 한 번에 폭발시키기라도 하듯 3승을 휘몰아치며 40승 고지를 가뿐히 넘겼다. 웬만한 공력의 기수들이 겪었을 법한 파란만장한 수습 시절을 보낸 김동수 기수는 한층 단단해진채로 프로의 세계에 도전장을 던졌다. 근성의 승부사, 김동수 기수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와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들어보았다.



-40승 소감은 어떠한가?
확실히 첫 승 때의 초조함보다는 덜했다. 똑같은 하나의 승수라고 생각해서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40승까지 1승이 남았다고 이야기를 해주더라. 그때부터 신경이 쓰였다. 마침 39승을 기록한 다음 주는 정지 기간이었고, 그 다음 주는 승을 못 쌓아서 2주 정도 공백이 있었다. 아홉수에 걸리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됐는데, 기분 좋게 40승을 채워 많이 후련했다. 특히 ‘천경’은 400kg대의 작은 말인데다 예민하기도 해서 훈련 당시에 고생을 제법 했던 말이었다. 게다가 능력검사 이후 마비증세까지 와서 마음이 많이 쓰이기도 했던 말인데, 이렇게 잘 풀려 우승을 거두어 너무 기분이 좋았다.

-같은 주에 다른 경주마들로도 우승하며 한 주 3승을 기록했다. 전반적인 컨디션이 좋았던 것 같은데?
평소와는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마음가짐이 달라지다보니 몸도 따라 좋아진 게 아닌가 싶다. 사실 편성도 세고 해서 우승까지는 바라지 않았고, 이 말이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자는 생각으로 임했는데 운 좋게 전개가 풀렸던 것 같다.

-소속 마방의 심승태 조교사 역시 소속 마필로 수습해제를 바랐다며 애정을 드러냈는데?
실제로 그 당시 소속조 마필 다섯 두에 기승을 했는데 모두 인기마였다. 게다가 경주에 임하기 전에도 “이번에 아홉 수 떼야지!”라고 이야기해주셔서 정말 든든했다. 많이 배려해주셨다는 생각이 들고, 그 배려에 따른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감사하고 뿌듯할 따름이다.

-잠시 데뷔 이전의 이야기를 해보자. 학창시절의 김동수 기수는 어떤 학생이었나? 운동을 전공한 것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냥 노는 것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아주 어릴 때는 동네 친구들과 밖에서 많이 뛰어다녔다. 계절별로 구슬치기도 하고 딱지치기도 하고. 그랬던 것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집안도 썩 좋았던 편이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조용한 성격이 됐던 것 같다. 운동은 원래 좋아했고 동경도 있었다. 어릴 때는 체조선수나 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많이 관심을 가졌는데, 적극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던 탓에 꿈을 접어야만 했다.

-진로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은 언제부터 했나?
일찍부터 했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크게 생각이 없어 실업계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됐다. 적성과도 맞지 않고, 흥미도 생기지 않다보니 결석도 많이 하고, 결국에는 그만두게 됐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 순간 스무살, 성인이 되어있더라. 덜컥 겁이 났다. 더 이상 철없는 청소년이 아니라 나도 한 명의 어른이 되었다는 게. 책임감을 가져야한다는 생각에 진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고향인 경북 포항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며 스스로 돈도 벌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과정에서 주변 분들이 요즘 세상에는 고등학교 졸업증은 있어야 훗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조언해주셨다. 그래서 검정고시를 쳤고 합격할 수 있었다. 나름 칼을 뽑으면 끝까지 하는 스타일이라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사회생활을 하며 만난 분에게 기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렇다. 지인 한 분이 나를 보면 늘 “체격이나 운동 신경을 보면 기수를 하는 것이 딱인데” 라고 하셨다. 그 분은 기수가 아주 어릴 때부터 준비해야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시고 아쉽다는 듯이 이야기해주셨는데 나도 계속 그 이야기가 뇌리에 남더라. 검색을 해보니 뭔가 운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때마침 지원할 수 있는 나이가 만 22세로 딱 마지노선에 걸리더라. 많이 고민을 한 결과, 도전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지원을 했다.

-가족들은 기수하는 것에 걱정하지 않는지?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나?
외동이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어하는 것은 꼭 해야하는 고집이 있었다. 왼손잡이였는데 어렸을 때 어떻게든 오른손을 사용하게 하려고 연필을 오른 손에 쥐어주면 던져버리고 왼손으로 글씨를 쓰곤 했다. 심지어 왼손이 악필이었는데도 말이다. 그 정도로 고집이 있었다. 한 번은 부상의 위험을 걱정해 부모님이 다른 일을 생각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유한 적도 있었지만, 내 성격을 아시기에 믿어주시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도 왼쪽 채찍이 편하겠는데?
그렇다. 아직 오른쪽 채찍은 많이 불편해서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목표 중 0순위로 꼽고 있다. 역시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더라. (웃음)

-약 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운명처럼 합격을 했는데, 얼마 못 다니고 군대를 가게 됐다고?
몇 개월 정도 후보생 생활 하다가 결국 입대를 하게 됐다. 입학 당시 24살이었고 해가 넘어가며 25세가 됐다. 입학하기 전에도 세 번을 미뤘던 터라 더 이상 미루면 안 된다고 하더라.

-아카데미 동기들이 서승운, 이아나, 이혁, 정동철 기수다. 아카데미 중간에 군대를 다녀왔다는 것에서 장단점이 있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먼저 데뷔한 동기들을 보면서 조급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 동기들의 성적도 워낙 좋았지 않나. 나도 할 수 있을까 싶어 늘 초조했다. 좋은 점이라면 후보생 생활을 길게 하면서 내실을 다졌다는 것? 전화위복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홀가분한 것도 있고. 이제는 말 타는 것에만 오롯이 전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것 같다.

-말과는 전혀 상관이 없던 삶을 살았었는데, 적응이 힘들지는 않았나?
어려움이 많았다. 입학 동기 후보생들이 대부분 말과 관련된 고등학교를 나오거나 승마를 배웠던 친구들이었다. 말에 처음 올랐는데 당시에는 멋모르고 그냥 막 탔던 것 같다. 말에 대한 교감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고 살아있는 동물이란 인식도 부족했고. 처음에는 자세에만 포커스가 맞춰진채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말과 교감을 느낀 순간은 언제부터인가?
어느 순간 탁하고 온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내 몸에 스며들었다. 매일같이 말과 함께하며 관리하고 호흡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데뷔전이 기억나는지?
당연하다. ‘수성비티’라는 말과 함께 했는데 생각보다 오히려 너무 몰랐기에 아무 생각 없이 탔던 것 같다. 관중들의 함성도 못 들을 정도였던 것 같다. 오히려 경주를 좀 타고 실제 경주를 알아가다보니 긴장이 더 되는 것 같다.

-기수 복색은 어떻게 정했나?
마침 내가 데뷔할 무렵 새롭게 추가된 색들이 있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너무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그동안 없었던 것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기본 바탕색들이 모두 새로운 색으로 이루어져있다.

-데뷔 한 달만인 7월 ‘수성비티’로 첫 승을 거두고 계속해서 승승장구가 이어졌다. 하지만 덜컥 부상을 당하며 상승세가 끊어졌는데? 어떤 일이었나?

사실 경주 때 다친 것이었다. 출발대 뒤에서 윤승하는 중이었다. 경주 준비를 하려고 고삐를 살짝 주고 깔대기와 경주 장비를 점검하고 있는데 순식간에 말이 기립을 하면서 그대로 뒤로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에는 참고 한 주 정도 경주를 더 치렀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어 CT촬영을 했더니 횡돌기가 골절됐다고 하더라. 정말 철렁했다. 한창 적응해가던 찰나였는데. 그래서 2주 만에 복귀하게 됐다.

-독한 성격인가보다.
탈만하니 탔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괜찮아졌긴 한데 복귀전에서는 허리가 안 들려서 푸쉬할 때도 상체에 힘을 못주고 허벅지 힘에 의존해 경주에 임했다. 회복을 위해 정말 노력했던 것 같다. 성격면은, 아쉬움이 남는 경주에 한해서는 내가 부족했던 부분이 떠올라 한 주 내내 기분이 안 좋을 정도로 민감하기도 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거기에 단념하고 나면 뒤끝없이 잊어버리곤 한다.

-기승 자세가 굉장히 낮은 편인데, 김동수 기수만의 특별한 기승법인가?
내가 가진 강점 중 하나가 유연함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낮은 자세에도 무리가 덜한 것 같다. 공기저항을 최소화하려고 하는 것인데, 단점도 있는 자세라서 요즘은 상황에 따라 상체를 들려고 노력 중이다. 결승선에 다가갈수록 더 낮아지는 이유는 막판 말몰이 때 고삐를 짧고 타이트하게 잡고 가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말과의 동작을 맞추기 위해 동작이 더 낮아지는 것 같다.



-복귀후 다시 상승세에 접어들었다. 당시 어떤 심정으로 경주에 임했나?
지금 돌이켜보면 급할 게 없는데 당시에는 매우 조급했던 것 같다. 한 주에 1승을 해야 마음이 놓이던 시기였다. 주변에서는 잘하고 있다고 해주셨지만 실질적으로 나는 계속 불안해했다. 지금은 많이 여유가 생겼고 물 흐르듯이 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민감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아르고위즈덤’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김동수 기수의 짧다면 짤은 기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는데. 장구를 들고 후검량 체크를 한 당사자도 본인이고, 당시의 상황을 온몸으로 체감한 주인공이라 보인다. 당시 기분은 어떠했나?

당혹스러웠다. 어떻게 하지, 앞으로 어떻게 상황이 펼쳐질까. 짐작도 하지 못했다. 거의 정신을 못 차렸다. 경주 중단 사태까지 벌어지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깨달았고 하얗게 질려버렸다. 전체 경주가 취소될 뻔했는데 사태가 진압이 됐고, 하필이면 재개된 첫 경주가 마침 내가 출전하는 경주였다. 부담이 너무 많이 됐다. 아무래도 못 탈 것 같다고 기수 변경 얘기까지 했다. 그때 함완식 선배님이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기수 변경을 하게 되면 네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는 꼴이다. 너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까 당당하게 나가서 경주에 임해라.”라고 하시더라.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자신감도 얻었다. 돌 맞을 각오까지 하고 예시장에 나갔는데 예상과 달리 팬분들이 “동수야, 신경쓰지 말고 경주 열심히 타.” 라고 하며 격려해주시더라. 정말 감동받았다. 사실 확실하게 점검을 못한 내 잘못도 일정부분 있다 생각하고, 책임감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건을 겪으며 정말 내 안의 많은 것을 바꾸어주었던 것 같다. 정신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생겼고, 팬들을 비롯해 믿어주셨던 많은 분들을 위해 정말 열심히 타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 후로 소속조가 정지되는 바람에 중간에 붕 떠버리게 됐는데, 37조로 바로 기승 계약을 체결했다.
사실 소속마방이 정지되며 나는 자연스럽게 계약 해지가 되는 상황이었다. 당장 기승계약을 해야만 경주에 나갈 수 있어 소속조를 구할 때까지는 기승을 못하겠구나 생각했는데 바로 심승태 조교사님이 계약을 하자고 하셨다.

-두 소속 마방 모두 기수 출신의 조교사님이 수장으로 있는데, 장점이 있나?
두 분 모두 매 경주마다 리뷰도 해주시고, 내 장단점을 체크해서 언제나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다. 행운이라 생각한다.



-그런 사건을 거치며 많이 단단해진 것 같다. 에서 최종 우승을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는 것이고 일반 경주에 섞여서 치러지는 것이었기에 부담감은 없었고, 똑같은 경주에 나선다고 생각했다. 해외에서 온 기수들이 아마 많이 부담을 가졌을 것이다. 새로운 나라에 와서 새로운 말을 타야했으니까. 나는 홈 이점을 많이 받은 편이다. 내가 해외에 나갔으면 반대가 됐을 것이다.

-우승 덕분에 조교사님들께 각인이 됐을 텐데 이후의 변화는 없나?
딱 하루만 화제되고 금방 묻힌 것 같은데….(웃음) 물론 그 이후 훈련 때나 지나가면서도 관계자분들이 응원이나 조언도 많이 해주시고 말 타는 것도 늘었다고 얘기도 해주신다. 내게는 정말 좋은 영향을 주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해외 진출에 대한 욕심은 없나?
수습기수 초청경주로 프랑스나 아부다비에 다녀온 적이 있다. 잔디주로 경험도 쌓고 선진 문물 경험도 쌓고. 확실히 큰 세계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기수라면 누구나 해외 진출은 꿈꾸는 부분이지만 여건상 힘든 것이 사실이다. 현재로써는 한국이나 현실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 뿐이다.

-해외나 국내에서 롤모델이 있다면?
어려운 질문이다. 특히 국내 기수 선배들은 배울 점들이 정말 많다. 선배 각자의 좋은 점들을 본받고자 노력하고 있다. 해외의 경우는 근래 들어서 조 모레이라는 기수가 있는데 그 기수의 경주영상을 많이 보는 편이다. 나와는 확실히 신체조건이 많이 다르다. 팔다리도 길고. 그러다보니 그 자세를 그대로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못하지만 마지막 추진 동작이나 채찍 사용법이 굉장히 심플하고 조용하다. 키가 큰데도 자세가 낮게 깔려있고. 결국에는 잘 타니까. 그래서 이끌어내는 능력을 배우고자 자주 보고 연구하는 편이다.


-올해 세웠던 목표가 있나?
세웠긴 한데 터무니없었다. 올초에는 시즌 40승을 하자고 목표를 세웠다. 당시에는 한 주에 10두씩 기승했고 첫 달에 6승을 하다 보니 목표를 크게 잡았다. 그런데 다음 달부터 한 주 가능 기수가 7두로 줄고, 사건도 터지고, 승수도 줄고. 그래서 이번년도에 수습기수를 해제하는 것으로 목표 수정을 했다. 수습해제는 달성을 했으니 남은 기간 동안에는 4승을 더해 30승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그것을 목표로 노력하려 한다.

-팬들이 늘어가고 있는데? 하마대에서 여성분이 음료를 건네주는 걸 봤다.
매주 응원와주시는 팬이 계신다. 내 이름이 적힌 프린팅도 해주시고 간단한 음료를 주시는 분도 계신다. 매주 너무 고마운 분이시다. 부부가 함께 오신다. 오해하면 안 된다. (웃음)

-팬들이 궁금해할 부분일 것 같은데,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는 어떤 계획을 잡고 있는지? 여자친구와 함께?
집에서 나홀로집에를 보며 케빈과 함께 보낼 것 같은 예감이다.



-기수로서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다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을 때까지 하는 것. 그게 목표다. 다쳐보기도 하고 다치는 주변의 모습을 보면서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더라. 안 다쳐야 기회도 오는 것이고. 지금 처럼만 꾸준히 열심히 타다보면 앞으로 어느 정도까지 성장을 할지, 스스로에게 궁금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고, 지금의 마음가짐만 유지한다면 도태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정도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매년, 내년의 나는 어느 정도일까 기대하고 있다. 그렇기에 다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인간 김동수의 꿈은?
좋은 사람을 만나서 “평범하게 아들딸 낳고 가족들과 오손도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가 꿈이다.

-응원해주는 팬분들께.
사실 아직 내가 크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도 못하고, 공인이라는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굉장히 당황스럽다. 믿어주시는 만큼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열심히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 아닐까한다.


작 성 자 : 조지영 llspongell@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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