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 도로지 씨가 소개한 총누리 셰르파는 스물세 살 먹은 건장한 청년이었다. 고향 파부르(빠뿌레)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닌 후 농사를 거들다가 승려였던 동생과 함께 카트만두로 나와서 트레킹 포터(짐꾼)로 일한지 4년이 되었다고 했다. 4년 동안 그가 경험한 산은 칸첸중가, 마나슬루, 르왈링,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랑탕 등이었다.

형제는 트레킹 시즌이 아닌 여름이나 겨울에는 고향에 돌아갔다가 봄 가을에 다시 카트만두로 나와서 트레킹 일거리를 찾는다고 했다. 아직 겨울인 한 달 전부터 카트만두에 나와 있었다는 총누리는 나와 함께 다시 고향으로 가게 된 것이 즐거운 듯했다.

그는 지난 4년 동안 주로 등짐을 지는 일만 해서 그런지 낯을 심하게 가렸다. 동향 사람에 대한 애착은 지나치리만큼 강한 반면, 낯선 사람이나 낯선 고장은 기피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만일 내가 총누리를 단순히 가이드 또는 포터로 고용했다는 생각으로 함께 여행했다면 짜증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또한 이래라 저래라, 이러지 마라 저러지 마라, 이건 싫고 저건 좋다는 등 잔소리도 많이 했을 터. 그러나 그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그가 먹자는 걸 먹고, 그가 자자는 데서 잤으며, 그가 멈추자는 데서 멈췄다. 한동안은 그게 편했다. 그러나 순례를 마칠 즈음에 이르러서는 내가 잔소리를 쏟아내곤 하여 그가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하지만 순례를 끝내고 작별할 때는 밝게 웃으며 서로의 손을 잡았다. 나는 총누리와의 순례를 통해 가이드 혹은 포터로 불리는 당사자들이 여행자의 사티였으면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포터라든지 가이드라는 영어식 표현은 고용주 입장에서 피고용인을 직능으로 분류한 용어지만, 사티라는 네팔 말의 뜻은 동료 - 동반자 - 친구 등인데, 때로는 배우자를 일컫기도 한다.

우리는 주로 셰르파 호텔에서 머물었다. 셰르파 호텔이란 솔루쿰부의 토박이 셰르파들이 나그넷길에 들르는 일종의 주막 겸 여인숙을 말한다. 셰르파 나그네들은 여기서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창(막걸리)이나 락시(소주)를 마시며 노닥거리고, 마침내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잠든다. 옛날 우리나라 나그네들의 주막집도 바로 이런 집이었을 것이다.

카트만두에서 10시간 가까운 버스 여행 끝에 도착한 지리에서 총누리가 안내한 셰르파 호텔, 즉 주막집에는 네팔 문자로 ‘타파팅’이라고 쓴 작은 간판이 붙어있었다. 이 허름한 셰르파 호텔은 총누리의 고향인 빠쁘레에서 오래전에 이주한 일가족이 운영했다.

지리의 중앙통에는 셰르파 호텔들 말고도 카트만두에서 오는 의류나 잡화, 플라스틱 공산품을 진열한 상가들이 줄지어있었다. 또 그 상가 앞에는 고추나 마늘 등 농산물을 파는 초라한 노점상이나 구두 수선공의 좌판 등이 있었고, 여행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호객꾼도 여럿 있었다. 그중 체르둥 롯지를 운영한다고 자신을 소개한 토박이 사내는 그 버스의 유일한 외국인인 나에게 체르둥 롯지에 묵기를 청했다.

체르둥 롯지에서는 태양열로 따끈하게 데운 물로 샤워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솔깃했지만, 롯지의 선택은 일단 총누리에게 맡겨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총누리는 체르둥 롯지의 사내를 따돌리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타파팅으로 갔다. 타파팅에 총누리의 고향인 빠쁘레 사람들이 주로 모이기 때문이었다. 주인도, 나그네도 모두 빠쁘레 사람이어서 안심하고 노닥거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음식도 총누리의 입에 맞았던 것이다.<계속>

 

총누리 셰르파. 스물세 살 먹은 건장한 청년. 고향 파부르(빠뿌레)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닌 후 농사를 거들다가 승려였던 동생과 함께 카트만두로 나와서 트레킹 포터(짐꾼)로 일한지 4년이 되었다고 했다. 
셰르파 호텔 내부의 총누리와 총누리의 사티. 오른쪽에서 석유등이 빛을 뿜고 있다. 
타파팅 셰르파 호텔. 셰르파 호텔이란 토박이 셰르파들이 나그넷길에 들르는 일종의 주막 겸 여인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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